[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1

22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23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마태오 17,22-23)

첫번째 수난예고(16,21), 세번째 예고(20,19) 사이에 두 번째 예고가 등장하는 단락이다. 마르코 9,30-32를 대본으로 삼아 조금 다듬어졌다. 22절에서 사람과 사람의 아들을 대비시킨 것은 마태오 16,13을 떠올리지만 이미 마르코 9,31에서 제시되었다. 사람들에게 수난예고를 비밀로 하라는 구절은(마르코 9,31) 마태오에서 삭제되었다. 베드로가 첫째 예고에서 이해하지 못했는데(마르코 9,32) 오늘 두 번째 예고에서 제자들 모두의 슬픈 반응이 보인다.

첫째 수난예고 장소인 체사레아 필립비(마태오 16,13) 이후 두 번째 예고는 갈릴래아에서 행해졌다. 그 사이에 모든 사건은 갈릴래아 밖에서 일어난 것을 암시한다. 갈릴래아를 언급한 사실은 단순하지 않다. 체사레아 필립비가 갈릴래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태오는 알았던 것일까. 예수는 곧 갈릴래아를 영원히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장정의 길을 시작한다. 갈릴래아는 예수의 근거지였다.(마태오 4,12) 제자들을 규합하고(마태오 4,18), 교회가 시작되는 장소이다(마태오 28,16) 고향에서 예수의 활동은 곧 끝나게 된다. 고향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죽음의 행군으로 향하는 예수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고향있는 사람들은 상상해 보시라.

▲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15~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의 작품
사람의 아들이 사람에게 넘겨진다고 예고되었다. 파라디도나이(paradidonai, 넘겨진다)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법률적인 뜻(감옥에 넘기다, 마태오 18,34)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뜻을 담고 있다. 하느님이 예수를 사람들에게 넘겨주신다는 뜻이다. 예수의 고난은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벌하기 위해 적들의 손에 넘겨주듯이(시편 106,41) 이제 사람의 아들을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첫째 예고에서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마태오 16,21) ‘사람들에게’로 바뀌었다. 예수는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외로움에 처한다. 사람의 아들과 사람이 맞서 있는 모습은 커다란 모순임을 마태오는 강조한다. 사람의 아들로서 장차 세상을 심판할 예수가 지금은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넘겨지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예수의 적대자인 유다교 지배층과 로마 군대를 가리킨다. 예수 죽음의 주범은 로마군대요 바람잡이는 유다교 지배층이다.

넘겨진 예수는 죽음에 처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을 계획하신 하느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신다. 죽음이 그렇듯 부활도 하느님의 뜻이다. 제자들의 반응에서 제자들의 몰이해를 마태오는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의 이해를 강조하였다. 제자들이 수난예고를 이해하지 못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이해하였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자들의 슬픔은 다시 등장한다.(마태오 19,22; 26,22) 예수의 운명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제자들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서 슬픈 것이다. 수난예고에 제자들은 사실 얼마나 놀랬을까.

‘넘겨진다’는 주제는 예수 수난역사에서 자주 나타난다. 죄인들 손에(마태오 26,45), 빌라도에게(마태오 27,2), 십자가 처형에(마태오 27,26) 예수는 넘겨진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화해를 실현한다. 예수의 죽음에서 인간과 화해하려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 죄지은 인류에게 분노하신 하느님이 기어이 인간에게서 희생제물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시 그런 문화에 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 그들 수준에 맞추어 성서는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당시 그런 대속론(代贖論)은 오늘날 현대인에게 이해되기 어렵다.

인간을 교육하시느라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 드라마를 하느님이 그렇게 펼치신 것이다.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다 보니, 하느님이 희생제물을 받아서 분노가 풀리는 모양새로 어쩔 수 없이 표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느님이 실제로 그렇게 옹졸한 분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런 생각은 하느님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성서에서 각본, 감독은 하느님이 맡으시고 주연배우는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고, 조연은 제자들의 몫이다.

성서에 나오지 않지만, 수난예고 때문에 제자들은 속내가 아주 복잡했을 것이다. 메시아에 대해 제자들이 가진 생각과 예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승리의 메시아를 기대한 것 같다. 예수의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난이 두려운 것이다. 예수 덕분에 한자리 할 야망도 그들에게 없지 않았다. 완장 차고 깃발 날릴 꿈에 제자들은 부풀어 있었다. 제자들은 각자 또는 집단토론과 논쟁을 통해 예수의 수난예고 의미를 두고두고 고심했을 것이다. 장고 끝에 악수 난다. 그러니 십자가 아래 제자들은 아무도 없다. 당시 예수 제자들처럼 그런 야망을 가진 종교인은 오늘날도 꽤 많다. 예수를 팔아 자기 지갑을 채우는 종교인들 말이다. 성서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종교인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초조하게 맞이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예고를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초라한 처지가 두려워 그 예고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제자들의 입장과 우리의 입장이 그리 다르지 않다. 고난은 예수 하나로 족하니 이제 우리는 만수무강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예수를 팔아 실속을 차리면 그만 아닌가. 그런 종류의 생각이 우리에게 없지 않다. 제자들의 슬픔에 우리도 동감하지 않는가. 솔직히 우리 처지가 그렇지 않는가. 그래서 슬픈 예수다. 세상에 예수를 언급하는 사람은 넘쳐나지만 예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인간의 야욕이 넘치면 예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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