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정 신부, 열린 사회교리 특강에서 ‘성경과 사회정의’ 2차 강연

“하느님은 인간에게 임마누엘을 보내시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함께하는 것임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회교리에서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대’의 개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연대하셨고, 그리하여 자신이 대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보속하셨으며,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오셨습니다.”

성서학자 최승정 신부(서울대교구 홍은2동성당 주임)는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연대’의 의미를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지난 23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박동호 신부) 사회교리학교 총동문회가 최 신부를 초청해 ‘열린 사회교리 특강’ 두 번째 시간을 마련했다. ‘성경과 사회정의’를 주제로 한 이날 강연에서 최 신부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되짚으며, 창세기에서 출발해 인류 역사에 걸쳐 하느님이 세상에 전한 가르침의 의미를 찾았다.

▲ 최승정 신부 ⓒ한수진 기자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축복 지켰듯이
민주주의와 인권 스스로 지켜야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6일에 걸쳐 세상을 창조하고, 마지막으로 자신과 꼭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첫 번째 인류인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자손들도 잘못을 저지르자 창세기 6장에 이르러 하느님은 세상에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했다. 이어 하느님은 홍수를 내려 새로운 시작을 이루었지만, 사람은 또다시 스스로 신이 되려는 욕심을 부려 태초의 혼돈으로 빠져들고 만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욕심내고 폭력적이 돼요. 만약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실패의 역사로 접어두고 끝내셨다면 좋았겠지만, 하느님은 집요한 분이에요. 아브람이라는 인물을 택해 그에게 축복을 내리시고 또 다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죠.”

오늘날까지도 ‘성조(거룩한 조상)’라고 불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은 세상의 가치로 평가할 때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번듯한 집이나 땅을 갖지 못한 유목민이나 떠돌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거룩하게’ 만든 요인에 대해 최 신부는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불콩죽 한 사발에 하느님의 축복을 팔아버린 에사우와 달리 그들은 축복의 가치를 알아봤고, 밤을 새워 함께 씨름한 존재를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면서까지 축복을 지켜낸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축복과도 같은 인권과 민주주의가 거저 주어진 것이고, 으레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편안한 마음을 가진다면 어느 순간 사라지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니 축복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다른 사람들이 지켜주지 않았듯이, 내가 지켜야 할 것을 누군가 대신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조들의 등장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어있지 못했다.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겨 하느님이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위험에 처하고, 백성들이 하느님께 청해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가면 또 다시 백성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반복됐다. 솔로몬 왕에 이르러서는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성전을 짓다가 건립비용과 일의 분배를 두고 분열이 일어나 지파들이 서로 갈라지는 불의한 일까지 일어난다.

“돌이켜보면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필요가 없었고, 그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서로 갈라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되짚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15~16세기 무렵에 가톨릭교회는 성당을 많이 지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전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난다고 생각했던 거죠.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도 그랬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베드로 성당이라는 문화유산을 얻었지만 교회는 분열하고 말았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어떤 종교든 되짚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 인간과 연대한 하느님의 가르침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애착은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하느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고 잘못을 꾸짖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은 하느님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린 일종의 벌이었다. 그러나 완전한 멸망이 아닌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최 신부는 “예레미야와 그를 중심으로 한 신명기 학파 예언자들은 ‘야훼 하느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결론을 얻음으로써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신학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패해 멸망한 것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신이 바빌로니아의 신에게 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유일한 신이라면, 자신의 다른 백성인 바빌로니아를 이용해 이스라엘을 혼낸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또한 이 과정은 단순히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시 정화하기 위한 시간이었던 것이죠.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엄청난 역사의 전환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에게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은 인간과의 계속된 굴곡진 역사 안에서 끝내 인간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었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두려워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에서도 증명된다. 이에 대해 최 신부는 “불의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을 홀로 있게 놔두지 않고 연대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보여주신 가르침을 세상에서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구원의 범위에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만이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는 폭력의 가해자들까지 포함된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억압관계에서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은 오히려 억압을 가하는 이집트인이다. 인간이 지켜야할 존엄성을 스스로 상실했기 때문이다. 최 신부는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라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집트에게도 해방 사건이어야 한다. 예언자들이 말한 ‘보편적인 구원’은 하느님 백성의 구원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과 영광이 모든 민족에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최 신부는 “오늘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강의실 여기저기서 ‘아니요’라는 답이 나왔다. 이에 대해 최 신부는 “그렇게 혼탁한 세상 한가운데서 교회가 너무 잘 지내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하며 예언직 수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강의를 마쳤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일까요?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 질문 앞에 철저히 반성하면서, 자신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과 나누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은 예언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예언직을 수행하는 길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들어야만 하는 부르짖음에 귀머거리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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