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91

1 그 후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2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고 있습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은 왜 여러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습니까? 4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5 그런데 여러분은 사람을 가르칠 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말만 하면 6 아버지나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여러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7 이 위선자들이여, 이사야는 바로 여러분을 두고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9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10 예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2 그때에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듣고 비위가 상한 것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13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나무는 모두 뽑힐 것입니다. 14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그들은 눈먼 길잡이들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집니다.”

15 베드로가 나서서 “그 비유의 뜻을 풀이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16 예수께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여러분은 아직 알아듣지 못하였습니까? 17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뱃속에 들어갔다가 뒤로 나가지 않습니까? 18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입니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 15,1-20)

▲ <율법학자들 가운데 선 예수>, 알브레히트 뒤러, 1506년

조상의 전통(1-9), 깨끗함(10-20)이라는 두 소재를 다루지만 내용상 하나인 오늘의 단락은 마르코 복음서 7,1-23을 주요 대본으로 삼았다.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마르 7,2-3). 이 부분이 마태오 복음서에서 삭제되었다. 마태오 복음서 15,1-3은 유다교 관습 전체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관습에 대한 토론이다. 마태오가 율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7,1-5, 요한 복음서 2,6에 언급되는 식사 전 손 씻기 관습은 공동성서(구약성서) 레위기 15,11에 보이긴 한다. 다른 구절은 모두 성전에서 손 씻기에 대한 것이다. 탈무드에 식사 후 손 씻기가 의무라는 구절이 보이지만 식사 전 손 씻기에 대한 언급은 아니었다.

식사 전 손 씻기는 성전에서 사제들이 지키던 습관을 성전 밖에 사는 일반 신자들에게도 적용시키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관심사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매일 아침, 그리고 공식적인 장소에서 돌아온 후 몸을 씻었다.

1세기에 식사 전 손 씻기는 랍비들과 평신도들에게도 일반적 규칙이 아니었고 2세기에 비로소 일반적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니 모든 유다인들이 식사 전에, 시장에서 돌아온 경우에 손을 씻었다는 마르코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마르코가 유다인의 관습을 잘 몰랐거나 알고도 일부러 실수를 한 것인가. 좌우간 마르코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로마 군대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백성 처지에 식사 전 손 씻기가 뭐 그리 중요했을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한 예수는 오히려 그들에게 반문으로 반박한다. 토론 규칙을 예수가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다. 5-6절에 등장하는 코르반(Korban) 관행이 유다교에서 실제로 행해졌는지 논란이 되고 있다. 성전에 제물로 바쳐진 물품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었느냐는 문제다.

이런 점에서 코르반에 대한 초대교회의 반박은 공정하지 않다. 도덕적이지 못한 맹세의 잘못을 율법학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맹세를 무효라고 선언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코르반은 부모에 대한 공경과 하느님에 대한 공경 사이, 즉 토라와 토라 사이의 모순이라는 점이 율법학자들에게 큰 어려움이었다. 초대교회가 코르반을 계명과 사랑 사이의 문제로 보았다면, 율법학자들은 토라와 토라 사이의 문제로 본 것이다.

이사야서 29장은 초대교회에서 즐겨 인용되었다(로마 9,20; 1코린 1,19; 콜로 2,22). “위선자”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 바리사이파가 곧 위선자가 아니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누구나 위선자다. 하늘 아래 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위선자다. 바리사이파를 위선자의 대명사처럼 언급한 초대교회의 잘못은 적지 않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수두룩하다. 무식해도 잘못이다.

13절 ‘하느님께서 심지 않으신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어렵다.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켰다(예레 45,4). 바리사이파가 하느님이 심지 않으신 나무라고 해설한다면 그들의 선민의식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종교적 자만심은 정말 고치기 어려운 병이다. 19절 ‘마음에서 나오는 죄’는 마르코 복음서 7,21 부분을 크게 줄인 것이다.

오늘의 단락에서 마태오는 율법 전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파의 율법 해석 일부를 비판한 것이다. 율법을 사랑이라는 계명 아래 놓으려는 것이다. 마태오 공동체는 이미 유다교에서 탈퇴하였고, 유다교에서 유다 전쟁 후 사두가이파와 에세네파는 모두 소멸되고, 사실상 바리사이파만 남은 상태였다. 오늘 단락의 논쟁은 예수 당시 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마태오 공동체의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예수와 마태오 사이에 적어도 50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오늘의 단락은 종교비판이라는 주제를 소개하고 있다. 남에 대한 비판은 먼저 자신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유다교에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성을 먼저 요구한다. 성서에서 유다교에 대한 미움을 재확인하기보다 유다교와 공동운명을 느껴야 한다.

오늘 단락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읽기에도 뜨끔한 구절이 한두 곳이 아니다.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먼 길잡이입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구절 앞에서 어디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가톨릭 주교들만 가슴이 섬뜩해질까.

형제, 자매 종교의 잘못을 내 종교의 잘못으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형제, 자매 사이다. 이웃 종교의 아픔을 내 종교의 아픔으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이웃 종교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더 말해 무엇하랴. 살 속의 살이요 뼈 속의 뼈 사이 아닌가.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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