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9

22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 군중을 돌려 보내셨다. 23 군중을 보내신 후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 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24 그동안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26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요. 안심하시오, 겁낼 것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29 예수께서 “오시오”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30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습니까? 그렇게도 믿음이 약합니까?”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33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 14,22-33)

▲ ‘그리스도께서 물 위를 걸으시다’, 시칠리아 몬레알레 대성당의 모자이크화
물 위를 걷는 예수,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출함이라는 두 강조점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물에 빠진 베드로 이야기는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서만 나타나므로 특히 주목해야 한다.

물 위를 걷는 예수 이야기는 마르코 복음서 6,45-52를 대본으로 삼았는데 마태오 복음서에서 여러 군데 고쳐지고 생략되었다. 배가 향하는 곳인 ‘벳사이다’라는 동네 이름(마르 6,45)은 그곳에 대한 예수의 저주(마태 11,21) 탓에 삭제되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렸는데(마르 6,48), 마태오에서는 배가 풍랑에 시달린다. 제자들 곁을 지나쳐가려는 예수의 장면(마르 6,48)은 마태오에서는 없어졌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결론 부분에 보인다. 제자들의 당황함이 마르코 복음서에서 돋보인다면(마르 6,51) 마태오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강조되었다.

같은 사건과 이야기를 두고 복음서 저자들의 표현이 서로 다른 것이 독자들에게 의아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예수의 드라마는 카메라 기사의 촬영 각도와 그 의도에 따라 화면이 다르게 나타난다. 더구나 촬영자는 예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예수 생전이 아니라 부활 이후에 촬영된 것이다. 예수에 대한 사색과 공동체의 사정이 촬영에 이미 반영되었다. 성서는 객관적 보도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해석된 신앙고백이다.

성서 해설에서 특히 피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성서 구절의 배경과 맥락을 모르면서 성서 구절을 함부로 인용하는 버릇. 둘째, 맥락이 다른데도 같은 단어가 나타난다는 이유로 그 단어가 나타나는 구절을 분별없이 열거하는 버릇. 셋째, 우리말이나 영어로 번역된 성서에 나타난 단어에 집중하여 성서 원문의 뜻을 이끌어내려는 버릇. 넷째, 성서 연구의 성과를 참고하지 않은 채 상상력에 근거하여 추리소설을 쓰는 버릇. 다섯째, 옳지 않은 목적으로 성서를 인용하는 버릇. 악마도 성서를 인용한다는 사실, 성서 인용주의가 성서를 망치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산”은 하느님과 만나며 기도하는 장소로 선호된다(신명 33,2). “새벽”은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도우시는 시간이다(이사 17,14). 물 위를 걷는 예수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2열왕 2,7.14)보다 홍해를 가로지르는 하느님의 모습이 더 연상된다.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다를 밟고 다니셨지만 대해(大海)를 건너질러 다니셨지만 아무도 그 자취를 몰랐습니다”(시편 77,19).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배”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ego eimi, “나요”)라는 예수의 말은 하느님이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히브리어로는 아니 후(ani hu / 신명 32,39; 이사 41,4; 43,10)로 표현되었다. ‘겁낼 것 없다’는 예수의 말은 이집트 파라오의 억압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하던 말(탈출 14,13),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 모세가 하던 말이다(탈출 20,20).

마태오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베드로가 제자들 그룹에서 돋보이게 등장한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언급되었다(마태 4,18; 8,14; 10,2). “주님이십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은 “나요”라는 예수의 말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가 스스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기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아는 것이다. 하느님이 스스로 먼저 인간에게 자신을 소개하셨기에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중요한 사상을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하느님이 스스로를 알려주심’(Selbstmitteilung Gottes)이란 말로 적절히 표현하였다.

‘살려 달라’는 베드로의 외침은 진지한 기도다. 그런 각오로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 지식층 신자들, 합리성을 존중하는 사람들,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흔히 기도를 무시하는 경향이 보인다. 기도가 인간의 합리성을 무시하지도 않지만 합리성이 기도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합리성의 효력과 그 한계를 동시에 아는 사람만 기도를 진지하게 할 수 있다. 기도와 합리성은 모순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 관계다. 합리성을 무시하지 말고 진지하게 기도하자.

베드로 일화는 불교에서 ‘자타카’ 전승과 아주 비슷하다. 그렇게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맥락은 서로 다르다. 불교계 일부에서 마치 예수가 부처의 제자인 것처럼 선전하는 모양이다. 예수가 젊은 시절 인도에서 유학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다. 만일 예수가 부처에게 배웠다는 주장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적극 환영할 일이지만, 아직 그런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33절에 나타난 제자들의 신앙고백에 베드로도 참여하고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마태 16,16)에 앞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먼저 등장한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제자들의 고백 장면을 그렇게 배치한 것이다. 공동체의 신앙고백은 개인의 고백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한다는 가르침이다. 베드로의 고백(마태 16,16)은 자주 강조되었지만 오늘의 단락에 나타난 제자들의 고백은 교회에서 그동안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베드로가 개인적으로도 부각되지만 제자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모습을 마태오는 더 강조한다.

“의심”이라는 그리스어는 본래 두 가지 방향의 길을 동시에 걷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마태오 복음서 21,21의 서로 분리된 생각, 마음이 헷갈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야고 1,8)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베드로처럼 의심을 갖거나 믿음이 약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베드로와 같은 수준에서 산다. 그러나 예수를 제대로 알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는 용기도 생길 수 있다.

진정한 용기는 예수를 제대로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 용기를 지닌 자에게 예수는 손을 내미신다. 질문하고 의심하는 용기도 결국 예수의 너그러운 품안에 있다. 용기를 내어 기도하기도 하지만, 기도하다 보면 용기가 생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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