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5

“47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48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차면 해변에 끌어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립니다. 49 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51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지금 한 말을 다 알아듣겠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예” 하고 대답하였다. 5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습니다.” (마태 13,47-52)

그물의 비유는 가라지 비유의 그늘에 가려 여전히 덜 주목되었다. 그물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공존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해설되어 왔다. 어부는 사람 낚는 어부(마태 4,19)와 사도들과 그 후예로 해설되었다. 고기를 잡는 것과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물 안에 잡힌 고기를 구분하는 내용이다. 마태오 복음서 13,30에서 가라지를 불에 태운다는 말씀과 달리, 여기서 나쁜 고기를 어디에 버릴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사게네(sagene)는 끌어당기는 그물을 가리킨다. 약 250미터에서 450미터 길이, 약 2미터 넓이의 그물 양쪽은 밧줄에 묶여 있다. 그물 한쪽에 납덩이나 쇠가 달려 그물을 물속에 가라앉게 하고 다른 쪽에 가벼운 나무나 코르크가 달려 있다. 배에 타서 그물을 펼치고 나중에 호숫가에서 그물을 잡아당긴다. 어부가 앉아서 고기를 추리는 모습은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의 아들(마태 19,28; 25,31; 26,64), 그리고 하느님 오른편에 오르신 주님과 하느님의 어린양(콜로 3,1; 에페 1,20)을 연상시킨다.

▲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두초(1311년).

갈릴래아 호수에는 약 20여 종의 물고기가 살고 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추리는 기준은 두 가지다. 먹을 수 있느냐, 율법에 허용된 깨끗한 고기(레위 11,10-)냐 여부가 그 기준이다. 고기 낚는 것은 원래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는 부정적인 뜻으로 여겨졌다. 하바쿡서 1,14에서 인신매매로 비유되었다. 그 구절에 대한 어떤 랍비 문헌 해설에서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듯이 사람이 토라를 떠나면 죽는다고 말한다. 예수의 ‘사람 낚는 어부’(마태 4,19) 말씀은 그러한 부정적 의미를 단숨에 좋은 뜻으로 바꾸어 놓았다.

49절에서 악한 자의 운명은 가려진다. 선한 자는 천사에 의해 하늘에 오른다고 말하지 않고 악한 자는 불구덩이에 처벌될 것이라 말한다. 이번에도 선한 자의 운명에 대해 말이 없다. 마태오는 그물의 비유를 사람들에게 경고의 뜻으로 쓰는 것이다. 물고기는 나면서부터 이미 그 운명이 정해졌지만 사람은 복음 앞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선택한다. 심판을 앞둔 사람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그물의 비유다.

51절 말씀은 신학자나 성직자뿐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언제나 기억해야 할 명문(名文)이다. “예”라 답변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 한 명도 없었다. 예수를 잘 모르면서도 예수를 알리는 직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서를 잘 모르면서도 성서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무모하고도 정직하지 않은 길을 어찌 걸을까. 스승은 많고 제자는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모습은 아주 의아하다. 성서 공부의 길에 겨우 25년, 성서 연구 초보자인 내게 갈 길은 아득히 멀다. 독일 시절에 나는 성서를 통해 예수를 아는 길을 겨우 배웠다. 남미 시절에 가난한 사람을 통하여 예수를 아는 길을 간신히 배웠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내용의 마태오 복음서 13,36-52에서 마지막 52절에 느닷없이 율법학자가 등장한다. 율법학자는 곳간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집주인의 역할로 묘사된다. 집주인은 곳간에서 과일, 포도주, 옷을 꺼내지 않고 왜 새것과 낡은 것을 꺼낼까.

예수를 따르는 율법학자는 오직 마태오에서만 나타난다. 마태오 공동체에서 뚜렷이 구분된 직책을 가리키는 단어 같지는 않다. 이 구절에서 율법학자는 공동성서에 식견이 있고 예수의 가르침에 관심이 깊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다(마태 23,8). 예수에게 배운 사람은 누구나 복음을 전할 임무를 받았지만(마태 28,19-) 그들 중에도 가르치는 특수한 임무를 맡은 사람을 마태오는 의식하는 것 같다.

보물을 관리하는 집주인이 신학자로 비유되고 있다. 신학자는 그렇게 소중한 보물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낡은 것은 공동성서를 가리키고, 새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복음을 가리킨다고 성서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생각한다.

마태오는 두 가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첫째, 새것이 낡은 것보다 중요하다. 둘째, 새것은 낡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 마태오는 예수를 강조하지만 예수와 유다교의 연결을 잊지 않는다. 1번은 그리스도교에서 언제나 강조되어 왔지만, 2번은 소홀히 여겨져 왔다.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와 연결되어 있다는 마태오의 생각은 오늘 성서학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어디 성서학자뿐이랴. 설교자들도 마땅히 마태오에게 배워야 하겠다. 마태오 복음을 잘 이해하는데 도움 되는 몇 가지 틀이 있다. 첫째, 행동이 믿음보다 더 중요하다. 둘째,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깊이 이어져 있다.

그리스도교가 빗나가지 않도록 감시하고 지적하는 일이 신학자에게 맡겨진 임무다. 신학자는 부자와 권력자의 하수인이 아니다. 교회 지배층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아니다. 신학자는 오직 성서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다. 신학자가 돈이나 명예를 탐하는 순간 자신의 몰락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