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81

24 예수께서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사람과 같습니다. 25 그러나 사람들이 잠들 때 그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26 밀의 싹이 트고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보였습니다. 27 주인의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당신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어디서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28 그러나 주인은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했다.’ 종들은 그러나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서 그것을 뽑기를 바라십니까?’ 29 그러나 주인은 말했습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지 않도록.’ 30 ‘추수 때까지 둘 다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 추수꾼에게 나는 말하겠다.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라. 밀은 그러나 모아서 내 창고에 모아라.’” (마태 13,24-30)

▲ <성 마테오 복음사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1400년
가라지는 그 뿌리가 밀보다 튼튼하고 독이 있는 이삭을 맺으며 60센티미터 높이까지 흔히 밀밭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팔레스타인에는 나무 땔감이 부족해서 마른 가라지가 땔감으로 쓰이기도 했다. 가라지는 자랄 때 겉모습이 이미 밀과 구분된다.

주인과 종의 대화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주인은 가라지가 자랄 때 가라지를 뽑지 않고 추수 때에 불태울 것이다. 둘째, 종들이 가라지를 뽑기를 바라지만 주인은 거절한다. 종 대신에 천사들이 그 일을 할 것이다.

오늘의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을, 종은 경건한 사람들을, 원수는 악마를 가리킨다. 가라지와 밀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자주 쓰인 소재다. 유다인들은 심판 날 악인은 처단되고 의인은 구출되기를 희망했다.

오늘의 비유에서 마태오 공동체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았다. 또한 예수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분명 존재하는 현실을 생각하였다.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마태오 공동체 가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공동체에게 밀과 가라지를 구분할 능력이 부족하다. 또한 심판의 시간은 오직 하느님이 하실 것이다. 그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독일 개신교 신학자 예레미아스(Jeremias)는 오늘의 비유를 마태오 공동체에 보내는 ‘인내하라는 경고’로 해석하였다.

예수는 오늘의 비유에서 누구를 겨냥하는가. 바리사이, 에세느파, 쿰란 공동체, 젤로데파처럼 자신들을 선택된 자로 자칭하며 죄인을 거절하는 분리주의를 예수가 비판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직에 죄인의 가입을 거부하고 죄인들과 접촉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예수는 죄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예수의 개방성이 돋보인다.

또한 마태오 공동체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가라지를 없애려는 종들의 열정을 주인은 거부했다. 교회가 하느님 대신 심판자로 행세하면 안 된다는 뜻이겠다. 교회는 하느님께 심판의 권한을 넘겨받은 적 없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이 하실 일이다. 교회는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어울리는 역할만 맡았다.

마태오 공동체에도 가라지처럼 사는 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비유에서 눈치 챌 수 있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안에서도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안다. 악행을 저지르는 종교인도 있다는 사실을 곧 느끼게 된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는 언제나 자기 회개에 애써야 한다. 회개는 세례 직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회개는 누구나 해야 한다. 더 이상 회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

오늘의 비유는 많은 질문을 자극하였다. 추수 때까지 왜 가라지가 자라도록 내버려 두시느냐 인간은 하느님께 항의할 수 있다. 세상에 가라지 같은 것이 왜 생기게 놔두셨느냐 하느님께 질문할 수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지 않느냐, 악은 대체 어디서 왔느냐고 하느님께 물을 수 있다. 요약하면 인간은 이렇게 하느님께 질문할 수 있다.

첫째, 악을 없앨 능력이 하느님께 있는가? 둘째,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하느님께 부족한가? 셋째, 하느님이 악을 허용한다면 하느님이 선하신 분인가?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는 하느님과 뚜렷이 모순되는 세상의 악의 존재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명확히 답변할 수 없다. 하느님이 인간을 교육시키기 위해 악의 존재를 허용했다는 해설은 납득하기 어렵다. 전쟁과 자연재해를 그렇게 해설할 수는 없다. 예수도 그런 문제에 대한 이론적 답변을 하신 적 없다.

신학이 답할 수 없는 문제가 분명히 있다. 답변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모른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신학자다. 다만 우리는 악이 줄어들도록 애쓸 뿐이다. 교회는 죄인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심판하지 말고, 회개와 자기개혁에 힘쓰며, 세상의 악을 줄이도록 애쓰라는 오늘 말씀의 가르침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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