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벗어나 지역 공동체로, 기도 넘어 이웃이 있는 현장으로

<한국일보> 10월 5일자 보도에 의하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관계자는 2007년 한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검사들 명단에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이름이 있었다고 전했다. 가장 첨예한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시의를 늦추지 않는 사제단의 기동성에 잠시 놀라게 된다. 분명한 것은 박근혜 정부 들어 신부들과 수녀들이, 다시 말해 천주교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전까지도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현장인 강정마을에서, 송전탑 설치가 강행되던 밀양에서도 국가 공권력에 의해 권리를 침해받는 이들을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은 지대했고 일종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 주었다.

최근 들어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천주교가 지난 대선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불법 선거 개입)을 민주주의의 적대적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꾸준히 또 강력하게 제기해 왔다는 것이다. 교구별 시국 선언과 단위 미사는 물론 전국 단위의 시국 선언과 시국 미사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고 공개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대구와 안동 교구의 이례적 참여는 더욱 눈에 뜨인다.

도리어 이러한 정국에서 천주교 내의 친정부적인 의견을 가진 이들은 사제단 쪽이 아니라 일반 교인들로 보이며, 이들의 집단적 목소리 역시 간간이 들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천주교 최고위의 내부 입장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겉으로는 이런 두 의견을 모두 존중하는 모양새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천주교가 생명과 평화와 인권에 대해 감수성을 발휘해 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군부독재에서 민주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진실과 거짓이 갈리는 결정적 사안에 대한 증언을 감당했던 천주교가 이제는 더 열린 민주 사회라는 사회적 환경에서 일반 국민들은 자칫 정쟁 현안이라고만 인지할 수도 있는 영역에서까지 개인 자격이 아닌 교구 단위의 집단 의사를 밝힌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대조적으로 개신교계는 파편적으로 또는 일부 교단 내지 연대 운동 등에 한해서 이 사안을 다루고, 의견을 개진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 천주교는 대선 국정원 사건을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규정하며, 꾸준하고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해 왔다. 대조적으로 개신교계는 파편적으로 또는 일부 교단 내지 연대 운동 등에 한해서 사안을 다루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진은 9월 23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국가정보원 해체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전국 시국 기도회. (사진 제공 지금여기)

사회적 공동체성

최근 몇 년 사이 서울시 등의 적극적인 추진에 힘입은 협동조합법의 제정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대안 기업으로서 협동조합의 설립에 대해 공부하기도 하고 그 상대적 유익에 관심을 보이면서 나름의 참여를 저울질하고 있다. 곳곳에서 세미나도 열리고 관련 서적도 출간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했던 것은 지역 협동조합에서 천주교의 역할이었다. 여러 외부 산업 환경과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협동조합들이 명멸하거나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 살아남아 사례와 모델이 되고 있는 협동조합들은 대부분 지역적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지역 또한 천주교 전통으로 다져진 곳이라는 대체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한 지역의 정치적 주체는 바뀔 수도 있고 역사 속에서 그 지역을 지배하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도 변할 수 있지만, 그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하며 정치적 주체와는 상관없이 살림살이를 이어 간다. 이른바 서민의 삶은 정권이 바뀌어도 매일매일 이어진다. 유럽 전통의 천주교는 권력과는 무관하게 지역 공동체 그 자체를 무겁게 여겼다는 추정을 하게 된다. 단위 지역 공동체에서 국가 공동체로 시선을 옮긴다면 천주교는 정부와 긴장관계가 이어지더라도 국가 구성원의 권익에 대해서는 과감히 대변하겠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해석을 덧붙인다면, 사제들의 소속은 교리적으로는 로마 바티칸인 동시에 실존적으로는 해당 지역의 신도들과 지역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입장으로 정돈된다. 최근 한 성당의 통상적 공지글이 비인권적이라는 구설수에 오르자 신속하게 사과와 시정을 한 것도 이런 태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가 겪은 개신교의 공동체성은 교회 중심이다. 순수하고 진지한 분들의 헌신도 주로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서의 봉사와 선교적 관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주 안의 형제자매된 동료 교인들에게 먼저 향한다. 사회는 이런 공동체성을 대안적 현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배타적 집단 이기주의로 치부한다. 한국 개신교의 대사회적 발언 역시 교회와 교인을 권리를 위한 것들이 더 눈에 뜨인다. 사학법 개정에서 보였던 집단 반발과 목회자 납세를 두고 벌이고 있는 해묵은 논쟁은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북한 인권이나 국가 보안과 관련된 입장들도 그 뿌리는 교회의 존재를 위협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적 심정이 배어 있음은 자타가 동의하는 바이다.

뒤바뀐 몸의 영성

천주교 신부, 수녀, 수도자들, 크게 보아 천주교 사제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피안적이고 수도원적인 삶을 사는 고매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간에 눈에 띄는 이들의 모습은 시위 현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직접 주민들을 위로하거나 보호하느라 경찰 측과 신체적 접촉도 불사하는 장면으로 대치된다. 무엇이 이들을 현장으로 내몰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치더라도 이들의 진리 추구의 방식, 즉 영성 도야의 방식에 대해서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미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더 이상 성당이 아니라 사건 현장이라는 점, 강론의 소재가 사소한 인간관계 속에서의 갈등 정도 아니라 국가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은 하늘뿐 아니라 땅으로까지, 정신뿐 아니라 몸으로까지 확장된 한국 천주교 영성에 대한 소박한 확인이다.

반면 요즘 개신교의 영성은 사변적이고 자칫 영지주의적이기까지 하다. 큐티와 매일의 말씀 묵상은 워낙 유익한 영적 훈련의 기본으로 자리 잡은 바라 이 논의에서 배제하더라도, 관상 기도와 내적 치유 사역이 휩쓸고 간 교회는 이제 각종 우울증 상담 센터를 방불한다. 중보 기도를 '받겠다'는 무속적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것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스리고 내적 평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동원되는 주문인 셈이다.

살과 피로 대변되는 실체인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죽으시고 육신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여전히 내면과 정신세계에 있어 영성의 표지로만 그분을 섬기는 것은 왜곡된 자기 사랑이며 같은 육체를 지닌 이웃 사랑을 외면하는 배교에 가까운 태도다. 이웃의 내면과 정신세계만 사랑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밥 한번 먹자라는 허언보다도 기도하겠노라는 현실 회피가 얼마나 큰 무책임인지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사실 기도하겠다는 허무한 약속은 이제 공개적인 거절과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은가? 우리의 참된 관심과 사랑은 그곳에 우리의 몸이 옮겨 가 함께하는 것임을 연이어지는 지인들의 결혼과 장례에 임하는 우리의 몸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 보면 현 시점의 한국 천주교의 행보와 더불어 신임 프란체스코 교황의 행보에 관심을 보이게 되는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나 신학적 언명들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운신 때문이다. 사뭇 정치적인 발언이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쓴소리가 공감을 얻는 것도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권력의 피해자들이고, 그의 호소가 교회 공동체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들을 향한 자비의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현안에 대한 옹호이든 비판이든 간에 현장에 가 보지도 않고 당사자를 만나지도 않은 이들이 쏟아 내는 이런저런 신앙적 수사에는 귀를 닫자. 그리고 현장의 당사자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겸손히 귀를 열자. 아니 그곳에 방문하여 그들을 만나자. 분명 내가 속한 공동체와 이웃의 몸을 살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삶의 중요한 시기는 물론 현재의 일상에까지 개신교적 환경 속에서 복음의 본질과 역할을 고민하며 살았던 그리스도인로서 내 눈에 비친 지난 몇 달간 천주교가 보여 준 풍경은 교리가 아닌 실존이었다고 해야겠다. 누구를 비판하는 것은 쉽고 그저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진지한 자기 성찰의 재료로 삼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아니 개신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교회적 공동체성을 넘어선 사회적 공동체성의 축적된 경험 없이는 다만 구호일 뿐이다. 또한 이웃의 살과 피를 사랑하겠다는 몸의 영성 없이는 속 빈 강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들의 공동체와 몸이 향하는 방향을 힘써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점이다.


황병구
 (한빛누리 재단 상임이사)

<기사 제휴 / 뉴스앤조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