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4

15 예수께서는 그 일을 알아채시고 거기를 떠나셨다.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 왔으므로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쳐주셨다. 16 그리고 당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17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보라, 내가 택한 나의 아이, 내 사랑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 그에게 내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는 이방인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으리니,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 없으리라. 20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드디어 그는 심판을 승리로 이끌어 가리라. 21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 12,15-21)

▲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을 뜯다’, 도레
“그 일”은 앞 단락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바리사이들의 음모를 가리킨다. 실제로 바리사이들이 그런 음모를 어떻게 진행시켰는지 마태오는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가 어디로 피신하였는지 역시 마태오는 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군중들이 예수를 따라왔다는 것이다. 군중이 예수를 보호했다고 마태오는 강조하려는 것일까. 예수에게 놀라워하고 가까이 하던 군중(oklos)이 예수를 거부하는 군중으로(laos) 돌변하기도 한다(마태 13,10-17; 27,25).

16절 “남에게 알리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강조된 예수 신분의 ‘비밀 지키기’ 명령을 마태오가 예외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귀신에게 예수가 명령을 지키라고 당부한 모양새가 마태오에게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는 19절을 해설하기 위해 마르코의 침묵 명령을 선택한 것 같다. 즉, 예수의 침묵 명령을 해설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이스라엘의 갈등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사야서를 인용하기 위해 침묵 명령을 소개하는 것이다.

18-20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서 구절은 히브리어 성서나 그리스어 성서의 해당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 곳이 많다. 성서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본문에 수정과 첨가를 통해 민중적 표현으로 옮겨진 타르굼(Targum)과도 잘 일치하지 않는다.

마태오 이전에 이사야서 42,1-4는 이미 초대공동체에 의해 바뀐 것 같다. 그렇게 전승된 구절을 마태오가 그냥 사용한 것 같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예수에게 유리할 구절을 뽑아 강조하는 일, 공동성서 본문을 손질하고 편집해서 유리하게 해설하는 일을 신약성서 저자들은 서슴없이 한 것이다.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성서 저자의 ‘학술적으로 어이없는 편집 작업’으로 보일 수 있겠다. 유다교 측에서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18절 파이스(pais)는 드물게 ‘종’을 가리키고, 라틴어 뿌에르(puer), 독일어 크나베(Knabe)처럼 대부분 ‘아이’라는 뜻이다. 신약성서 마태오 복음서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말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는 파이스가 ‘종’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 번역에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18절을 읽는 독자는 당연히 예수의 세례 장면을 떠올리겠다. ‘사랑받는’, ‘마음에 드는’은 거기에서 나오는 단어다(마태 3,17). 이사야서 인용도 세례 부분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누구인지 마태오 복음서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내용이다.

18절 크리시스(krisis)는 오늘 단락의 해설을 결정짓는 ‘핵심 단어’다(crux interpretum). 영어 crucial(중요한)은 라틴어 크룩스(crux : 십자가)에서 파생된 단어다. 크리시스는 우리말로 ‘정의’ 또는 ‘심판’으로 옮겨질 수 있다. 그 단어가 그리스어에서 ‘정의’로 이해된 적은 거의 없다. 마태오도 그 단어를 최후 심판으로 이해하였다. 히브리어 이사야서 42,1에 크리시스에 해당하는 단어도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교 개혁시기(‘종교개혁’이라고 잘못 번역되는) 개신교 학자들은 ‘정의’로 옮겼다. 그러나 독일 신 · 구교 공동번역본에는 ‘심판’으로 적절하게 번역되었다. 우리말 공동번역과 새 번역에는 ‘정의’로 옮겨져 있다. 찬성할 수 없는 번역이다.

우리말이나 영어로 번역된 성서 구절이나 단어에 너무 집중해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거나 고집을 피우는 버릇은 성서 공부에 추천하기 어렵다. 마음에 드는 성서 단어 하나를 깊이 묵상하는 습관은―만일 성서신학 연구 성과를 주목하지 않는다면― 상상력에 근거한 신학이 생길 수 있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성서 베껴 쓰기도 같은 위험 앞에 있다. 교회와 성당에 ‘자칭 성서학자들’이 드물지 않다. 그리스도교에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상상력에 근거한 신학’이다.

“다투지도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으리니”는 예수의 평화, 또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 같다(마태 11,25-30; 12,18-21). 19-20절의 여러 단어는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 쉽다. 역시 초대교회에서 비유적 해설이 유행하였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죄인이나 흔들리는 믿음에 비유되었다. 심지어 유다인과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잘못 해설되었다.

마태오에게 이사야는 메시아(구세주)를 선포하는 예언자다. 예수 탄생(마태 1,23), 세례자 요한의 설교(마태 3,3), 예수를 빛으로 소개(마태 4,15-)하는 장면에 이사야가 인용되었다. 우리 병을 짊어지고 고쳐주고, 그래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를 이사야는 소개한다(마태 8,17). 마태오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메시아인 예수를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의 중심 내용 중 하나인 ‘메시아 비밀’이 마태오 복음서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신분을 알리고 싶어도 참고 또 참은 마르코. 예수를 메시아로 어서 알리고 싶었던 마태오. 자제력이 강한 마르코와 열정 가득한 마태오―위대한 두 신학자의 서로 다른 모습을 우리는 보는 것이다. 성서 저자마다 자신의 지식과 공동체 상황에 따라 예수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마르코와 마태오는 바울처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복원할 때다.

오늘의 이사야서 인용에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예수의 역사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라는 말씀이겠다. 갈등과 고통 속에도 희생의 길을 묵묵히 걷는 예수를 보라는 뜻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는 사람만 예수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타나는 ‘하느님 아들’ 신학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아는 사람만 땅을 이해할 수 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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