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의 칼럼에 답한다

정부 출범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의 불법 댓글공작 논란에 이어 최근 사회복지 관련 공약의 파기 논란으로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의혹’ 사건을 터뜨려 국정원 위기를 덮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천주교 사제들과 수도자, 평신도들까지 나서서 몇 달째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며 시국선언과 시국미사를 봉헌하더니, 지난 23일에는 잠자코 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마저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하며 국정원 개혁을 넘어 ‘국정원 해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시 어느 언론에서는 지속적인 천주교의 시국선언운동으로 박근혜 정부가 ‘저온화상’을 입고 있다며 염려했는데, 이제 그 화상 입은 상처가 덧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줄곧 박근혜 정부를 비호해 온 조선 · 중앙 · 동아일보는 매주 반복되는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를 모르쇠로 일관하며 국민들의 관심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최한 전국 사제 시국미사가 봉헌된 주간 목요일(9월 26일) <동아일보>에서 갑자기 송평인 논설위원이 칼럼을 통해 ‘천주교 시국선언의 일탈’을 고했다. 요지인즉, 시대가 바뀌었으니 교회는 정치 문제에 간섭하지 말고 ‘기도’나 하라는 뜻이다. 게다가 민주적이지 않은 천주교가 민주주의를 거론하는 게 격에 맞지 않는다는 훈계까지 덧붙였다.

▲ 지난 23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 사제 시국미사 ⓒ한상봉 기자

송평인은 칼럼에서 주교에서 사제까지 훈계의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이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를 제일 먼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주교가 국정원 규탄을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면 그 발언은 사제와 신자에게 의견이 아니라 명령이 된다”며 “현실정치에 종교적 신념이 개입하면 위험하다”고 꼬집었다. 미리 밝혀둘 것은 강우일 주교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9월 10일)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은 주교회의 등에서 공식적으로 표명한 견해도 아니며, ‘사목교서’와 같이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 발표된 것도 아니고, 언론에 ‘개인적인 의견’을 밝힌 것이다.

주교회의의 견해라 해도 신자들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권고’임을 감안한다면, 강우일 주교의 발언은 강제성 있는 발언이 아니라 ‘열린’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주교는 교도권을 통해 신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관해 복음적으로 식별하고 판단을 내릴 의무가 있으며, 신자들은 이러한 식별을 숙고할 의무가 있지만, 법적인 의무사항은 아니다.

한편 종교적 신념은 일부 교리적 내용의 반복이 아니며,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적용되는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적용 문제이기 때문에, 현실정치 역시 종교적 신념에 따른 실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치 · 사회 · 문화적 활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으며, 주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종교적 신념을 교회 안에 가두어두려는 송평인의 태도는 전혀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사실 교회 안에서 교도권적 발언이 신자에게 닿는 순간,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정치적 행위가 되기 때문에, 현실정치와 종교적 신념을 분리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느 신자가 어떤 정치적 태도를 취할 때, 이미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종교적 신념이 반영되기 마련이며, 어떤 종교적 태도를 취하더라도 거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태도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 동아일보 홈페이지 동아닷컴 갈무리
송평인의 논리 가운데 가장 황당한 것은 교회는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말하고 나서, 곧바로 “교회가 세속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이상 불가피하게 속세의 권력과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딴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평인은 종교사학(宗敎私學)의 자율성을 지키거나, 낙태 문제 같은 것을 거론할 경우로 교회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면서, 천주교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논할 자격이 없다고 훈계한다. 주한 교황청 대사의 고압적 태도를 거론하며,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가진 천주교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송평인은 천주교회에 ‘민주주의’를 주문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제들을 비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그의 생각에 교회는 민주화되어야 하지만,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발언처럼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몰린 게 아니라 과잉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민주주의가 과잉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게 민주주의인데, 주인이 주인 행세를 제한적으로 해야 옳다는 뜻일까?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송평인은 결국 자신이 비민주성을 들어 공박한 교황의 말을 빌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송평인은 “훌륭한 가톨릭 신자는 정치에 개입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끝까지 읽어보면, 교황이 말한 “정치 개입이라는 것은 정치가들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사악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좋은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단언하며, 이 말을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제멋대로 읽은 지난 5월 18일 성령강림대축일 전야 미사 강론에서 교황은 “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정치가 혼탁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계속 혼탁하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며, “양떼를 찾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고립을 자초하는 목자는 목자가 아니다. 교회가 폐쇄적이면 부패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결정적으로 송평인은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제들을 정치 환경이 변한 줄 모르고 나서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들로 규정하고, 천막농성 중인 김한길 민주당 대표를 방문해 “지난 대선은 원천 무효”라고 말한 함세웅 신부에게 “거추장스러운 신부의 옷을 벗고 차라리 정치인이 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민주주의와 친하지도 않은 성부나 성자나 성령”을 들먹이며 정의 운운하는 게 우습다고 조롱했다. 고유한 위격을 지니시면서 사랑 안에서 일치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송평인의 무지한 인식을 접어두더라도, 그는 국정원 해체를 요구하는 사제들의 행위를 공격하기 위해 천주교회의 신앙 전체를 싸잡아 조롱하고 있다.

여기서 여전히 남아있는 천주교회의 권위주의를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꾸준히 개혁되고 있으며, 적어도 지난 세기 동안 새누리당 정권이 보여준 것처럼 공권력을 이용한 선거공작이나 공안탄압, 가난한 이들에 대한 몰염치한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다. 종교는 자신의 내적 원리에 따라 고유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합리적 대안을 찾아가고 있다. 이러한 종교 고유의 내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정치적 태도와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특정 종교를 폄하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전임 천주교 의정부교구장이었던 이한택 주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송평인의 칼럼을 공유하며 “송평인 논설위원님, 값진 질책의 말씀 감사합니다!!! 모든 천주교 신자 특히 ‘정의감에 불타고 있는’ 사람일수록 겸허한 자세로 가슴 아프게 하는 충언에도 귀를 기울이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찬사의 코멘트를 달아놓은 것 역시 이해할 도리가 없다.

이한택 주교는 2010년 3월 12일 주교회의가 춘계 정기총회를 마치면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채택했을 때, 정진석 추기경과 더불어 이 성명을 끝까지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주교단은 “한국 천주교의 모든 주교들은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이 이 나라 전역의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반대를 표명했으며, 최근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 이한택 주교는 사회교리의 자리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놓아둔 것은 아닐까? (* 이 사진은 본 칼럼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한상봉 기자

이한택 주교는 자신의 언급에 대해 한 네티즌이 반박하자, 오늘의 <매일미사> 묵상 글을 인용해 읽어보라고 권하며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큼은 우리의 행동거지를 가늠하는 확실한 잣대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말하고, 그분처럼 행동하고, 그분처럼 살면 됩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예수님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묻고 싶다.

이한택 주교의 <조선일보> 사랑은 각별한 듯하다. 지난 8월 이후 이한택 주교의 페이스북에는 모두 7개의 신문 칼럼이나 기사가 링크되어 있는데, 그중 5개는 <조선일보>의 칼럼과 사설이며, 1개는 <평화방송>이고, 나머지 1개는 <동아일보>에 실린 문제의 송평인 칼럼이다. 이한택 주교가 세상을 읽는 창문이 <조선일보>와 가끔 <동아일보>라면 교회와 한국 사회를 위해 참 슬픈 일이다. 그분이 섬기는 하느님의 말씀이 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통해 필터링되었으니, 그 결론이 무엇일지는 뻔하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사제들의 시국선언이 어떤 주교에게는 ‘성령의 작용’으로 분명히 보이는데, 어떤 주교에게는 ‘성령을 거스르는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했지만, 어느 주교는 정치권력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이한택 주교의 보수언론에 대한 편식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대는 누구의 친구인가? 예수인가, 아니면 황제인가? 민주주의의 벗들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적들인가?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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