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9]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 함께 길을 떠나셔야 한다는 모세의 기도에 “내가 친히 너를 데리고 가서 너를 편하게 하리라”(탈출 33,14)고 답하신다. 모세의 기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하면서 청하자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 …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탈출 33,18-23)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자유로이 하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라는 말씀이다. 결국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사람들의 삶 안에서 확인된다는 말씀이다.

▲ ‘산상 설교’(부분), 프라 안젤리코, 1437~1445년

예수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구마(驅魔) 행위를 하였다고 성서는 전한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병을 인간 죄의 벌(요한 9,2)이라고 가르친 반면, 예수는 ‘불쌍히 여겨서, 측은히 여겨서, 가련히 여겨서’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마르 10,46-52)

예수는 하느님이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분’임을 실천으로 보여 준 것이다. 구마 행위는 정신병환자나 간질(癎疾) 환자를 고쳤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정신질환자나 간질 환자를 마귀 들린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하느님이 아니면서 우리 안에서 하느님 노릇 하는 것을 추방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렸다고 신약성서는 보도한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이면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예수의 그런 행위는 하느님은 그 함께 계심에서 인간을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루카 복음서(15장)는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린다고 불평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말씀하신 예화들이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루카 15,1-3)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마음, 잃은 은전 한 푼을 찾기 위해 애쓰는 여인의 마음, 잃었던 아들이 돌아오자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한 사람도 제외하지 않으시고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수는 안식일과 율법을 범하면서 율법과 안식일로 차단된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 하느님에 준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예화(루카 18,9-14)에서, 바리사이는 율법을 잘 지킨 자기의 행위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을 빌면서 하느님과 함께 있다.

예수는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소”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중풍병자’(마르 2,5)에게,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루카 7,48)에게,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8,11)에게 예수는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 사람들은 율법을 빙자하고,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을 단죄하지만, 예수는 용서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천하신다.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 양보하지 않았다. 그분이 그 시대 종교 기득권층과 갈등을 겪고 죽음에 이르는 원인이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는다. 제자들이 죽음에 직면한 예수를 떠나는 것은 살기 위해 대책을 세우지 않는 예수에게 실망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신을 위한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든 노력을 한다.

그분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게 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일만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 예수는 당신의 실패 앞에서도 하느님을 부르면서 자기가 변할 것을 받아들인다. 게쎄마니에서 기도하면서 예수는 아버지를 불렀지만, 하느님은 침묵만 지키신다. 이 어두운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도 예수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위해 당신 자신을 잃는 죽음에까지 갈 것을 서슴지 않았다.

제자들은 하느님을 부르지 않고 유혹에 빠진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침묵 앞에 잠들어서 그들도 침묵으로 답한다. 그들이 깨어난 것은 도망가기 위해서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곳이 유혹이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무엇을 보증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가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십자가 앞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예수는 하느님을 부르고 죽는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카 23,46)는 기도로써 예수의 생애를 끝맺게 하는 루카 복음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끝까지 자기를 변화시킨 예수의 최후를 잘 요약하는 말이다.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끝까지 스스로를 변화시킨 한 생명의 당연한 귀결이다. 하느님은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도 함께 계신다는 것이 부활이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예수의 삶 안에 나타나는 가치들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아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에 비해 역구조적(逆構造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의 것에 비해 역구조적인 가치들을 자기에게 주어진 지침으로 삼고 살면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 것은 나와 다른 이 세상의 개체 하나가 함께 있듯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 과거 신앙인들의 언어가 하느님을 너무 의인화(擬人化)하였다. 상상력을 좀 발휘하자. 하느님은 원(圓)인데 그 원의 중심은 곳곳에 있고 그 원의 한계를 긋는 선(線)은 아무데도 없다고 상상하자. 하느님의 말씀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의 삶을 실천하는 자녀들이 있고, 그 자녀들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중심들이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 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탈출 33,18-23)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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