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0

20 예수께서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 동네들을 꾸짖으셨다. 21 “코라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3 너 가파르나움,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저승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행해진 이적이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2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20-24)

▲ ‘베타니아의 예수’,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4년)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마무리됨을 암시하는 단락이다. 코라진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으로 약 3㎞에 위치한, 가파르나움 위쪽 마을이다. 요르단강과 이어지는 호수 동쪽에 위치한 마을 베싸이다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를 기념하기 위해 영주 필리푸스가 공통년(서기) 2년 전에 세우도록 명령한 마을이다.

막달라, 티베리아스, 세포리스 등과 달리 갈릴래아 호수 북쪽 마을만 언급된 점이 특이하다. 유다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기에 그런 것 같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으로 공동성서(구약성서)에 이스라엘의 적으로 표현되었다(이사 23; 에제 26―28).

코라진을 저주한 20절은 의아하다. 예수는 거기서 이적을 행한 기록이 복음서에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밖 시리아에 살던 마태오 공동체는 이 말에서 그들의 이스라엘 선교 노력이 실패하리라 예수가 예상했다고 느꼈겠다. 회개할 때 쓰는 베옷(요나 3,5-)과 재(다니 9,3)는 공동성서적 표현이다.

오늘의 심판 예고는 두 가지를 전제한다. 심판 날에 의로운 이의 부활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부활이 기대된다. 심판의 상벌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심판 날은 공동성서에서 익숙한 표현이다(이사 34,8; 유딧 16,17). 심판(krisis)은 마태오 복음서에 12번 나오는 단어다. 영어 crisis(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하늘과 저승은 공동성서에 반복되어 나타난다(아모 9,2; 시편 139,8). 저승(sheol)은 처벌받는 지옥이 아니라 모든 죽은 이가 가는 곳이다. 오늘의 단락과 가장 가까운 표현은 이사야서 14,9-15 같다. 띠로와 시돈은 그 부유함과 사치로 공동성서에서 비난받던 상징적인 마을이다. 소돔은 저주받은 땅 자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된 곳이다.

가파르나움이 어디라고 예수는 저주를 퍼붓나. 그곳은 예수가 살던 마을이다(마태 9,1). 그곳으로 이사 온 것은 예언서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일 정도로 의미 있는 사건이다(마태 4,13-). 그런 고향을 예수가 저주했으니 마을 사람들의 충격은 대단하겠다. 예수에게 특혜 받은 지역은 없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로마, 미국 등 예수에게 특혜 받을 땅은 지구상에 없다! 예수에게 특혜 받을 사람도 지구 위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과 성인성녀만 예수에게 특혜 받는다. 오늘 등장하는 마을이 예수에게 저주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이적(異蹟) 행위에 나타난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특정한 지역이나 그룹을 비난하자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예수를 오래 알아왔지만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큰 문제다. 오늘 그리스도교의 위기는 대부분 내부에서 생겼다. 그리스도교 밖보다 내부가 사실 더 심각한 위기다. 지금 그리스도교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선교가 아니라 회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교가 진실로 회개한다면 선교는 저절로 될 것이다. 회개를 회피하려고 선교에 집중하는 수법은 헛된 작전이다. 자신부터 회개해야 할 사람들이 회개하자고 외쳐대는 풍경은 참 야릇하다. 개혁 대상들이 개혁하자고 깃발 들고 완장 차는 모습과 비슷하겠다. 정치에만 그런 술수가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런 교묘한 술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교황 프란치스코 취임 이후 느닷없이 개혁을 외치는 종교인들―그들의 평소 모습과 달리―이 가톨릭에 수두룩하다.

오늘 단락에서 마태오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사람들의 책임 있는 태도를 강조한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책임을 박탈하지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은총은 제대로 깨달은 사람일수록 책임감이 더 강하다.

마태오는 또한 믿음의 공동 운명을 강조한다. 가파르나움 사람들 모두가 예수를 거절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예수를 따른 제자들은 있었다. 그럼에도 가파르나움은 저주받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쓸데없는 우월감은 신학적으로도 근거가 없다.

성서에서 심판이나 저주 같은 낱말을 보고 당황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뭐 저리 옹졸한가?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닥칠 위험을 마련해 놓을까? 자녀에게 닥칠 위험을 부모는 미리 알리려 애쓸 뿐이다. 저주받지 않도록, 심판에서 살아남도록 예수는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는 그렇게 표현하였다. 구원도 심판도 사람들 수준을 감안한 교육학적 방식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하느님이 옹졸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수의 방식이 인간적이다.

예수의 언어 사용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청취자의 운명에 동참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식사한다. 둘째, 청취자가 쓰는 언어를 존중한다.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예수처럼 식사를 자주 한 위대한 인물이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러나 사람들의 운명에 동참하긴 싫고 하고픈 말은 많다면 어찌 될까. 오늘 종교인들의 말에 힘이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말을 많이 하되 삶이 귀족적이면 어떻게 될까? 귀족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고 설교를 자주 하면 그 말은 추락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말과 삶이 다른 분이 아니었다. 예수는 현장에서 신학을 설파한 분이다. 구원은 현장에서 시작된다. 신학자 또한 현장을 의식해야 한다. 성서신학도 현장을 주목해야 한다. 성서신학이 그저 옛 문헌을 연구하는 학문인 것은 아니다. 성서에 등장한 단어와 문장 분석으로 세월 보내는, 그래서 오늘을 판별할 수 없는 성서신학자라면 아직 반쪽짜리 학자다.

성서 저자들은 언어의 힘을 믿은 사람들이다. 진리는 언어 속에 온전히 담겨 있진 않지만, 진리는 반드시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언어 아닌 방법으로 진리가 전달된다고 믿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대중적 전달 방식인 언어를 무시하고 비밀스런 엘리트적 전달 방식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흔히 있다.

그러나 성서는 언어로 기록되었다. 성서가 만일 기록되지 않고 일부 특수한 사람들의 비밀스런 방법으로 후대에 전승되었다면 그리스도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바울의 편지만 남아 있었다면 또 어찌 되었을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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