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7]

여인이 일꾼들의 다급한 전갈을 받고 타작마당에 갔을 때 남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일꾼들 말에 따르면 타작마당에서 일을 끝내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서서 웃저고리의 터럭을 털어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포졸들이 달려들어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듯이 남편을 끌고 갔다고 한다.

남편이 끌려가자 남편의 집안에서는 여인의 머리채를 손으로 감아쥐고 개 패듯이 때리고 차며 온 동네를 끌고 다녔다. 그들은 포졸들에게 끌려간 여인의 남편처럼 자기들도 애매하게 화를 당할까 두려워 여인을 매도하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네 년놈이 천주학을 했기 때문에 우리 가문이 멸문지환(滅門之患)을 당하게 됐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던 1866년 가을의 일이다.

외세의 문호개방 요구가 드세던 그 시기에, 기존 통치 질서와 주자학의 세계관을 수호하고, 자신의 정치생명을 지키기 위한 극약처방으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해 온 대원군은,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고 나서 올린 호군(護軍) 김병준의 상소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김병준은 상소에서 서양침략을 막는 길은 오로지 천주교도를 모조리 잡아 죽여 그 뿌리를 없애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대원군은 선참후계(先斬後啓)의 변칙적인 방법으로 천주교도를 처리하게 하였다.

하지만 지방 수령들은 천주교도 탄압과 처형 등에 관한 성과가 자신들의 진급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난 후로는 천주교도 처형 보고를 소홀히 하여, 당시 순교한 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관리들은 처형당한 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정부에 상납하는 관행을 이용해서, 그저 순교자의 재산을 중간에 착복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김진소 저, <천주교 전주교구사> 참조).

▲ 해미순교성지 ⓒ정현진 기자

마침내 여인은 당시 네 살, 일곱 살 먹은 두 어린 아들과 함께 빈손으로 동네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때 길에서 만난 포졸들로부터 남편이 해미에 끌려가 자리개질(군인 네 명이 사형수의 팔과 다리를 각각 하나씩 잡고 구호 소리에 맞춰 높이 들었다가 세차게 돌다리 위로 내던지는 형벌로 단번에 두개골이 깨지고 내장이 터져 나와 사망하게 됨)로 사망하였으니 시신을 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라는 말을 듣게 되지만, 집안과 이웃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한 처지에 돈이 어디 있겠는가.

여인은 어린 아들들을 한 곳에서 기다리게 하고 밤을 틈타 덕산에서 해미까지 백리 길을 찾아간다. 평생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한 젊은 여인이 산짐승들, 도적들이 득시글거리는 좁고 무서운 산길을 걸어 해미에 도착하여 군인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시신을 더듬었지만, 얼굴이 다 깨지고 피범벅이 된 채 장작더미처럼 쌓인 시신들을 아무리 뒤적여보아도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순교자의 증손자 방재희 필립보 고증록 참조).

기진맥진하여 두 아들에게 돌아온 여인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유랑걸식하며 사람들의 박대와 배고픔을 이겨내야 했다. 간신히 간양골이라는 교우촌에 도착한 후에도 졸지에 남편을 잃은 여인의 삶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처참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기구한 삶 가운데서도 여인은 천주 신앙을 굳건히 지켰으며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고(故) 방윤석 신부(왼쪽)와 방경석 신부. 순교자의 후손인 두 형제 신부가 가톨릭 마라톤 동호회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방경석)
비록 경황 중에 여인의 큰 아들은 생사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둘째 아들을 통해 새로 움터 나온 자손들이 순교자와 순교자 못지않은 고난을 겪으며 신앙을 지켜낸 여인으로부터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방 씨 집안이 잘라버린 그루터기에서 5대만에 대전교구 사제 두 사람이 배출되었다. 얼마나 많은 순교자와 그 가족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겪어야 했을까? 신앙을 보존하기 위한 희생이 워낙 컸던 만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교와 변신의 유혹에 무너져 갔을까?

그러나 여인이 지킨 그루터기에서 움터 나온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는 1975년 25세의 나이에 사제가 되어 청양 다락골 성지를 개발하고 대전 평화방송을 설립하는 등 성실한 사제의 길을 걷다가, 2012년 8월, 선종 4개월 전에 진단받은 말기 식도암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였다. 방 베르나르도 신부는 선종 3일 전에 당신이 주임신부로 사목 중이던 본당에 ‘천국 가는 여행 준비 피정을 마치면서’라는 제목의 고별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생동안 베풀어 주신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리며, 조선시대 백정 출신으로 순교한 황일광 알렉시오의 마지막을 당신의 사표로써 소개한다고 써 있었다.

황일광 알렉시오는 “세상에서 나는 이미 천국을 맛보았는데, 순교하면 그보다 더한 천국이 영원히 지속된다니 얼마나 그 기쁨이 크겠느냐?”고 하면서 웃으며 목을 내놓았다고 한다. 방 베르나르도 신부의 삶의 여정에도 이와 같은 순교자 후손으로서의 긍지와 각오가 걸음마다 배어있었다. 비열하게 얻은 부와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친일파나 매국노 후손들의 수치와 불명예가 뿌리깊이 남아있는 것처럼, 슬픈 역사와 가난으로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하여도 애국자나 순교자 후손들의 자부심과 명예는 그 향기를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남편을 순교형장에서 잃고 형극의 삶을 마친 여인은 교우촌 근처 도고산 기슭에 묻혔다. 그러나 아직 집안을 추스를 겨를이 없던 가족들은 여인의 무덤 위치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여인이 가르쳐준 ‘온화한 성품과 기도생활로 하느님과 일치하며 살아야 된다’는 교훈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가을볕이 따가운 어느 날, 고조할머니의 삶에 대해 깊은 연민을 품고 있는 방경석 알로이시오 신부와 함께 도고산을 오르게 되었다. 그 산 어딘가에 있을 여인의 무덤을 생각하며 나는 순교자 후손에게 물었다. “그 후 온양 방 씨 문중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방경석 신부가 말했다. “우리는 온양 방 씨가 아니라 하늘나라 방 씨예요. 나는 여당도 야당도 아닌 성당에 속한 하늘나라 방 씨로서 살아갈 뿐이고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하늘나라 이 씨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내 얼굴에도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이 아름답게 비쳐왔다.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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