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8

7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 군중에게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러 사막에 나갔습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8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입니까?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습니다. 9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러 나갔습니까? 예언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10 ‘너보다 앞서 내 사자(使者)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쓰인 말씀은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킵니다.

11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일찍이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큽니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습니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13 그런데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납니다. 14 여러분이 그 예언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임을 알 것입니다. 15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마태 11,7-15)

▲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성 요한 세례자’,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의 작품, 1655년
7-11절은 루카 복음 7,24-28과 거의 일치한다. 12-13절은 루카 16,16을 대본으로 한 것 같다. 세레자 요한을 재림할 엘리야와 동일시한 구절(마르 9,11-13; 마태 11,14-15)이 루카 복음에는 삭제되었다. 10절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삽입한 구절로 보인다. 세례자 요한의 정체에 대한 예수의 대중강연을 듣는 장면 같다.

마태오는 두 가지를 강조하려 한다. 첫째,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다. 둘째,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재림 엘리야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그 의미를 전적으로 인정하였다.

자신을 따라온 군중에게 사막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간 이유를 예수는 묻는다. 갈대가 많은 사막 지역에 일상적인 산보를 위해 간 것은 아니라는 질문이다. 물가에 자라는 갈대와, 물이 드문 곳에서 자라는, 우리 제주도에서 특히 멋진 억새를 마태오는 구분하였나?

8절의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그리스어 단수 명사로 나타난다. 당시 갈릴래아를 통치하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를 정확히 가리키는 단어다. 사막에서 헤로데 안티파스를 보는 것은―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타이쎈(Theissen)의 의견과 달리― 당시 사람들에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사막 지역인 예리코, 키프로스, 마싸다에 별장을 지어놓고 거기에서 지내곤 했다.

8절에 예수의 정치 비판이 담겨 있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1992년 발간한 슈바이처(E. Schweizer)의 마태오 복음 주석서 번역본 294쪽에는 독일어 원본의 ‘빈트보이텔(Windbeutel)’을 ‘바람개비 같은 자’로 옮겼다. 그 단어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번역해야 더 적절하겠다. 백성에게 미움 받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를 예수가 비꼬는 그 단어의 생생한 느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번역이다. 미움 받는 정치인을 동물에 빗대는 표현―나는 찬성하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는 어법―을 평범한 우리뿐 아니라 예수도 쓰셨다. 욕설, 저주, 화를 내며 산 예수는 우리와 비슷한 갑남을녀다.

예수를 마치 우리 형님이나 오빠 대하듯 생각하는 것도 참 좋겠다. 예수와 막걸리 한 잔 부딪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예수는 애주가시니 독주가 좀 더 낫겠다. 예수의 어깨를 툭 치면서 농담도 건네며 말이다. 그 얼마나 멋지고 인간적인가.

예수도 교황도 우리 가까이 있다. 피부 사이가 가까운 사람에게 애정이 더 가는 것이 세상 법칙이다. 나는 자주 마음속으로 바울과 논쟁하며 산다. 공식 활동을 말하자면 술로 시작해서(가나안 혼인잔치 포도주 이적, 요한), 술로 마친(최후의 만찬) 예수인데, 술을 마치 종교적 금기사항으로 가르치는 종파가 있다. 술을 거의 하지 못하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규정이다. 과음, 폭음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구름 위가 아니라 내 2미터 곁에 예수는 계신다.

9절 “더 훌륭한 사람”이란 비교급 표현은 최상급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에서 그런 해석은 가능하다. 11절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성서적 어법이다(욥 14,1). 특별한 인물을 가리키는데 쓰이던 그 표현을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배려하였다.

예수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부터 하늘나라 ‘시간이’(kairos)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11절 “가장 작은 사람”(mikroteros)은 교회를 가리키는 단어로 초대교회부터 해설되었다. ‘가장 작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도 가장 훌륭한 유다교 신자보다 더 크다’라는 부끄러운 말까지 생기기도 했다. 오늘 단락에서 예수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 누구나 저 위대한 세례자 요한보다도 더 크다는 엄청난 뜻이다. 작은 사람은 성서에서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100년 전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하르낙(Harnack)이 지적한 것처럼, 12절은 신약성서 주석에서 오늘도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불투명한 구절 중 하나다. 근본주의 계열의 성서학자들은 12절 하늘나라에 폭행을 가하는 사람을 젤로데파로 흔히 이해한다. 유다교 문헌에도 그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폭력을 반대하느냐 여부를 논하는 단락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거절한 당대 사람들을 비판하는 맥락이기 때문이다.

13-14절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설명이지만 예수에 대한 설명을 동시에 포함한다. 메시아를 예비하기 위해 파견된 예언자를 거절하는 사람은 메시아를 거절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연속성이 잘 드러나는 오늘의 단락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자신의 회개에서 출발한다.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오히려 남에게 회개를 재촉하고, 회개할 필요가 적은 사람은 우선 자기 가슴을 치는 경향이 교회와 사회에 있다.

둘째, 불의에 저항한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 모두 정치범으로 사형 당했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 사실 가장 정치적이다. 회개를 촉구한 세례자 요한, 이웃 사랑을 가르친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된 역사가 그 사례다. 회개와 이웃 사랑을 악의 세력에게 부르짖으면 곧바로 보복이 뒤따른다.

종교인들은 신자들에게 회개와 이웃 사랑을 매일 윽박지르기보다 먼저 부자와 권력자에게 가서 그렇게 해야 한다. 착하고 소심한 신자 앞에서 무서운 호랑이가 되다가, 어디에 가면 자발적으로 고양이 앞의 쥐 신세로 자처하는 지배층 종교인이 적지 않다.

살기 힘들어 메시아를 찾아 헤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우리도 느끼자. 우리도 가난한 사람이고 같은 운명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옳고 좋은 생각만으로 세상, 다른 사람, 구조, 교회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을 바꾸겠노라 설치다가 자신도 바꾸지 못한 채 세상에 누를 더 끼치고 무덤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 폐를 덜 끼치고 살아도 이미 대단한 삶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우선 자신부터 바꿔나갈 일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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