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보 여행가 황안나 씨

“무서웠어요. 떠난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누가 나를 좀 말려줬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나 국토종단 간다고 사방팔방에 소문을 냈어요. 소문내면 안 갈 수 없잖아요.”

도보 여행가 황경화(안나) 씨가 두려움에 떨며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길에 오른 건 10년 전인 2004년, 당시 황 씨의 나이는 65세였다.

▲ 도보 여행가 황안나 씨 ⓒ문양효숙 기자

황안나 씨는 40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본인 표현대로라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그는 정년을 7년 앞두고 불현듯 학교를 그만뒀다.

“애들 하교 지도를 한 다음에 텅 빈 교실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창밖을 보고 있었어요. 그 순간이었을 거예요.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 이제 내 맘대로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번득 들어왔어요.”

황 씨는 이 마음을 따랐다. 학교를 그만두고 뭘 하겠다는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 노릇’을 하고 싶었다.

“6남매의 맏이였어요. 누나 노릇, 언니 노릇하며 살았고, 결혼해서는 아내 노릇, 엄마 노릇, 또 교사 노릇을 했죠. 그러니까 ‘내 노릇’은 못하고 산 거예요.”

학교를 그만두고 ‘신나게 놀던’ 황 씨는 산행을 시작했다. 64살이 될 때까지 우리나라 산은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65살 되던 해, 산악회에서 광주 무등산에 간다는 공지를 받고 ‘불현듯’ 국토종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소심하고 결단력 없는 성격이라는 그는 “아마 나한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황 씨는 23일 동안 땅끝 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800㎞에 이르는 길을 걸었다. 도착지인 통일전망대에 들어서는 순간, 철조망 너머의 북한을 바라보며 ‘통일이 되었다면 신의주까지 갔을 텐데’ 생각한 황 씨는 ‘그럼 내년엔 여기에서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걸어볼까?’ 하는 계획을 세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이미 다른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2년 뒤, 황 씨는 67세의 나이로 동해에서 남해, 서해를 거쳐 임진각까지 해안도로 4,000㎞를 일주했다. 118일이나 걸린 긴 여행길이었다.

“혼자 걸으시면서 외롭진 않으셨어요?”
“아이고~ 왜 안 외로워요. 사무치게 외롭죠. 비수기 바닷가는 걸어도 걸어도 어디 길 물어볼 사람 하나 안 나타나요. 애교하고는 거리가 먼 성격인데, 어느 땐 남편에게 전화해서 ‘여보’ 하고 부르면 벌써 코끝이 찡해지는 거예요. 길 위에서 많이 울었어요.”

▲ 동해 화진포를 걷고 있는 황안나 씨 (사진 제공 / 황안나)

그렇게 외로웠고, 때론 무서웠지만 자유의 바람은 황 씨를 끊임없이 다른 여행길로 이끌었다. 떠나고 싶다는 열망은 두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는 이후 국내뿐 아니라 네팔, 인도, 몽골, 스페인 산티아고 등 전세계를 누비며 걸었다.

황 씨의 첫 도보 여행기는 <내 나이가 어때서>(샨티, 2005)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해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 책이 나온 날, 황 씨는 대형서점에 가서 자신의 책이 쌓여 있는 걸 멀리서 지켜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어떤 아저씨가 내 책 두 권을 사서 계산대로 가는데 쫒아가서 계산해주고 싶더라고요. 내 책을 내가 샀어요. 책을 정말 좋아하고 많이 읽긴 했지만 내 책이 나올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나 자신에게 감동받았죠. 나를 위해 뭘 해본 적이 없어서 나 자신에게 감동 받을 일이 없었거든요.”

황 씨는 이후 자신의 블로그 ‘맛있게 살기’에 연재했던 실수담과 그로부터 얻은 나름의 지혜를 버무린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샨티, 2008), 만학으로 한글을 깨친 어머니와 함께 쓴 <엄마, 나 또 올께>(조화로운삶, 2011) 등을 출간했다.

소중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발견하게 해준 길 위의 시간

그는 차도 옆 살구꽃밭에 누워 배낭을 베고 꿀잠을 자는가 하면 무덤가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간혹 무서운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길 위에서 그는 지나간 삶을 천천히 돌이키기도, “하느님, 잘못했어요” 하고 펑펑 울며 홀로 고해성사를 하기도 했다. 혼자 걸었던 긴 시간은 그가 ‘삶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걸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큰 선물이었다.

“제가 허영심도 있고 체면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데, 빚 다 갚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니까 한없이 비싼 옷을 사기도 했다니까요. 힘든 길을 반복해서 걷다 보니, 살면서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소중한 것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바뀌었어요.”

황안나 씨는 30년 가까이 남편의 빚을 갚으며 살았다. 남편의 사업은 서점, 조경, 양계 등 손을 대는 것마다 잘 풀리지 않았다. 냉방에서 메주콩만 먹으며 혼자 아이를 낳았고 밥 먹듯 끼니를 굶었다. 수업시간에 채권자들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 나가기도 했다. 첫째 아들을 낳으면서 시작된 절대 빈곤의 삶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얻을 때 끝났다. 하지만 황 씨는 당시를 ‘고통뿐이었다’거나 ‘무의미한 시간이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자존심도 세고 교만했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이 확실히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으신 것 같아요. 이웃도 좀 생각하게 됐고 내 삶의 깊이도 좀 깊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남편이랑 신뢰가 있었어요.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그렇게 안됐던 거예요. 그러니까 어려운 시기를 지냈어도 한(恨)으로 남지는 않아요.”

▲ 도보 여행가 황안나 씨 ⓒ문양효숙 기자

‘70만 되도 하겠다’던 90살의 어머니, 나이는 장벽이 되지 못했다.

황안나 씨는 65세라는 나이에 국토 종단을 떠날 수 있었던 건 ‘엄마 덕분’이라고 했다. 황 씨의 어머니는 70살부터 경기도 포천에 동생이 마련한 땅에서 혼자 농사를 지었다. 6남매의 김장과 메주까지 준비해 놓은 뒤, 농사일이 없는 겨울에만 자식들과 함께 지냈다.

“엄마가 90이 되시던 해에 집안 결혼식이 있었는데, 한복이 너무 낡은 거예요. ‘엄마, 한복 한 벌 맞추자’ 했더니 ‘야야~ 이 나이에 무슨 한복을 맞추냐. 일흔 살만 되면 하겠다’ 하셨어요. 동생이 어느날 ‘엄마, 집이 낡았는데 집을 새로 지어 드릴까요?’ 했더니 ‘야야~ 내가 일흔 살만 되도 하겠다’ 하셨어요. 생각해보니 내가 우리 엄마가 되고 싶은 나이, 우리 엄마가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은 나이잖아요. 내가 뭘 못하겠어요.”

황 씨가 70이 되던 해에 해외여행을 떠나며 “엄마 나 미국 갔다 와서 다음주에 엄마 보러 못 와” 하고 인사했을 때, 어머니는 “그래, 젊어서 많이 다녀라” 하고 답했다.

간혹 산악회 회원들이 “누님이 진작 시작하셨어야 하는데” 하고 아쉬움을 표현하면, 황 씨는 “지금 하고 있으면 되는 거지”라고 답한다. 전국 곳곳으로 강연을 다니는 황 씨는 자신이 60대 중반에 모든 걸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64살에 국토종단을 하고, 65살에 첫 번째 책을 내고, 66살에 산티아고를 걷고, 해안일주를 하고, 73살에 두 번째 해안일주를 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생겨도 나이나 조건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체념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전에는 누가 ‘그렇게 도보 여행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세요’ 하면 대답을 못했어요. 비결이 어디 있어요.그냥 걸은 거지.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대답해요. ‘문지방을 넘으세요.’ 용기잖아요, 용기.”
“결국 몸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향해 움직이지 않으면, 언제나 이루지 못한 욕망으로 남는 거겠죠?”
“사람들이 이걸 하고 싶다 생각할 때, 동시에 못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요.”
“왜 그럴까요?”
“겁나니까요. 실패할까봐, 갔는데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닐까봐서요. 그러니 ‘내가 애들 두고 어떻게 떠나’, ‘몸이 아픈데 어떻게 떠나’,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그걸 해’ 하고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요. 하지만 열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한 개씩 따져보면 정말 그것 때문에 못하는 이유는 거의 없어요. 간절함이 덜한 게 아닐까 해요.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대부분은 하게 되더라고요.”

황안나 씨도 73살에 두 번째 해안일주를 떠나기 전에 ‘가능할까?’라는 염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길 위에 나설 수 있었던 건 “가능하지 않을 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해보고 싶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주가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오늘 한 걸음 내딛는 것으로 충분했다. 오른발을 움직이려면 왼발을 내딛어야 하는 법이다.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만리길이 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워가는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 도보 여행가 황안나 씨가 스페인 시루에냐 해바라기 밭을 걷고 있다. (사진 제공 / 황안나)

소소한 나만의 버킷리스트, 삶을 잘 마무리 하고 싶다

황안나 씨는 교통방송 라디오 ‘오지혜의 좋은 사람들’에서 매주 화요일 ‘안나 할머니와 세상을 걷자’ 코너를 진행하고, 월간 <사과나무>에 여행기를 연재하는 한편, 전국에서 강연을 하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분주하게 현재를 사는 그에게도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버킷리스트는 있어요. 보통 사람들의 꿈 리스트는 거창하던데 저는 소소해요. ‘63빌딩 걸어서 올라가보기’가 있었어요. 그건 해봤죠. 손녀딸이 올해 대학 1학년 됐는데 같이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 남편에게 산티아고 길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건 남편이 못 걸을 테니 안 될 것 같고. 몸이 말을 안 들으니까 할 수 없는 게 많아지네요. 그런 건 좀 슬프긴 해요.”

황 씨는 이어, “삶을 잘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걸 늘 잊지 않고,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간소하고 가볍게 가고 싶다고 말이다.

“늙어가니까 서로 함께할 날이 얼마 없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어느 날 밤에 잠이 깼는데 남편 등이 내 눈 앞에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게 편하고 좋았어요. 하지만 눈을 떠도 남편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거잖아요. 그런 걸 생각만 해도 코끝이 시려지긴 하지만 자연의 순리니까 내가 받아들여야죠. 우두커니 앉아 슬퍼하기만 할 순 없잖아요.”

그는 자식들에게도 수시로 ‘몇 백만 원 하는 수의 말고 깨끗한 면으로 된 옷 하나면 된다’, ‘비싼 관 말고 나무관으로 해라’, ‘부고 남발하지 말고, 장례식 끝난 뒤 엄마 친구들한테 장례 잘 치렀다고만 알려라’ 등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장례식 이야기에 손사래를 치던 아들 내외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이맘때 걸으면 좋을 길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남 영광 선운사요. 꽃무릇이라고도 부르는 새빨간 상사화가 딱 이때 피는데, 빨간 페인트를 확 뿌려놓은 것 같아요. 아, 그리고 봉평 메밀꽃도 보러 가고 싶네요. 9월말에 만개해요. 하얗게. 메밀꽃하고 꽃무릇은 꼭 봐야 해요.”

황안나 씨는 고은 시인의 ‘그 꽃’이란 시가 자신의 삶 같다고 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자신에게 찾아온 마음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어, 그는 꽃을 발견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