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연중 24주일) 루카 15,1-32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개의 비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양 한 마리를 잃었다가 그것을 되찾아서 기뻐하는 목자, 은전 한 닢을 잃었다가 되찾아서 기뻐하는 여인,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고,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굶어죽게 되자,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 이렇게 세 개의 비유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계기는 그분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비난에 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처신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비웃고 비난하였습니다. 그 비난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비극에까지 이릅니다.

오늘 비유 이야기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목자,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단념해야 할 여건에서도 단념하지 않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기뻐하는 인물들입니다. 목자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온 산을 헤맵니다. 여인은 잃어버린 은전 한 푼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 이야기의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잃었던 것을 되찾아서 기뻐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의 아버지는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아들에 대해 배신감을 갖지도 않고, 원망이나 보복도 하지 않습니다. 이 세 개의 이야기들이 모두 죄인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조명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자 유산을 취하고,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패륜의 시작입니다. 그 아들은 멀리 떠나가서 재산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을 모두 누렸습니다. 그리고 받은 유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재산이 없어지자 그는 사람들의 냉소를 받으며 굶주려야 했습니다. 그런 궁지에서 그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자기와 같이 굶주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전혀 생각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만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후, 아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복권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하는 말입니다.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아들에 대한 분노도, 탕진한 재산에 대한 추궁도 없습니다. 이것이 돌아온 죄인을 맞이하는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연장하여 하느님에 대해 상상합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하느님이 당연히 하실 일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느님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기준으로 행동하신다고 우리는 상상합니다.

인간 사회는 그 원리를 바탕으로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교육기관은 성적과 품행이 우수한 학생을 택하고 나쁜 학생을 버립니다. 운동시합에서 우승한 선수는 박수갈채를 받고 패자(敗者)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그의 잘못에 비례하여 벌을 줍니다.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예수님에게 항의하는, 오늘 복음의 바라사이와 율사들도 하느님은 당연히 그런 질서 안에 살고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율법을 못 지키고 성전이 요구하는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하여,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죄인이라 버려진 사람들을 예수님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대교는 병든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죄인이라고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고쳐주며 격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 비유들은 죄인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그를 되찾아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완성된 세상을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느님을 향해 가면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 완성되는 세상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습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자식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창세 1,28)고도 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모습대로 살 사명을 지녔고, 온 땅에 퍼져서 그분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이를 비롯해서 고통당하고 불행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고통과 불행은 퇴치됩니다.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행동하시지 않고, 사람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마음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시면서, 그 가엾이 여김이 온 땅에 실천될 것을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은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엾이 여기고 영접하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일을 우리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인과응보의 좁은 공간을 넘어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의 넓은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기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인과응보의 좁은 원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가엾이 여기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가엾이 여기지 않고, 인과응보의 잣대로 이웃을 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고 외치는 선교사들의 독선적 선언에도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사람을 가엾이 여긴 그분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요한 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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