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 마지막 회]

양떼를 몰고 광야를 유랑하는 베두인 목동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가는 모스크는 시나이 산 초입에 자리한 성 카타리나 수도원(St. Catherine’s Monastery) 안에 있었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가 양치기 시절 모세가 야훼의 계시로 ‘불붙는 가시떨기나무’를 보았던 자리에 세운 작은 예배당에서 비롯된 이 수도원은 서기 530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Ⅰ, 서기 527~565년 재위)에 의해 대폭 정비되어, 현재까지 수도원 기능을 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수도원이다.

다합 시가지와 시나이 산 중간쯤에 자리한 베두인 캠프에서 하룻밤을 노숙한 뒤, 새벽 일찍 먼동이 트자마자 곧장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향했다. 약 1시간쯤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메마른 사막을 달려가다가 보니, 드디어 수도원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흙먼지가 뿌옇게 이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산길을 한참 걸어올라 가다가 보니, 올리브나무 숲 사이로 계곡 오른쪽에 자리한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멀리서 바라보니 서기 4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성녀 카타리나의 이름을 본 딴 수도원은 요새처럼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많은 침략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1400년 동안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수도원은 하루에 딱 3시간(아침 9시~정오)만 일반 관람객의 입장을 허용하고 있었다. 완강하게 닫힌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계곡 건너편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서히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수도원 전경을 묵묵히 응시해 보았다.

▲ 시나이 산 초입, 성 카타리나 수도원 전경 ⓒ수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베두인들이 즐겨 마시는 박하차를 마시며 들려주는 이집트 영어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시나이 반도에 정착해 있던 수도자들의 은신처로 복원된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부속 도서관 안에는,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성서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헬라어(그리스어)를 비롯해 시리아어, 콥트어, 아랍어 등으로 기록된 희귀본 성서들이 다량 소장되어 있는 이 도서관에는, 1500년의 신비를 간직한 시리아 사본(Codex syriacus)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신약성서 27편의 내용이 전문 수록되어 있는 시리아 사본은 수천 년 동안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되어 왔으나,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런던의 영국박물관으로 옮겨져 버렸다고 한다.

이집트 가이드의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이탈리아에서 온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반드시 도서관 내부를 관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묵묵히 모닥불을 지피며 차를 다리던 베두인 목동 가운데 한 명이 수줍은 표정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두터운 수도자를 통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도서관 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다고 했다.

얼핏 듣기에는 광야를 유랑하는 베두인 목동과 수도자의 친분이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입증해주는 명백한 표상인양, 놀랍게도 수도원의 높이 치솟은 종탑 옆에는 초승달이 걸린 이슬람 모스크가 나란히 서 있었다.

한참 후, 마침내 수도원의 견고한 출입문이 열리자 베두인 목동들과 수도자들의 남다른 친분은 곧장 확인되었다. 한바탕 요란하게 수도자들과 포옹을 나누던 베두인 목동들은 이내 종탑 옆에 자리한 모스크로 달려가 경건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베두인 목동들이 모스크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수도원 본당 중앙에 자리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카타리나 성녀의 유해가 안치된 금관(金棺) 앞에 무릎을 꿇고 간략한 예를 올리고 난 후에, 우리는 다시 수도원 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박물관 안에는 이콘(icon)이라 불리는 목판 성화가 다량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손에 복음서를 들고 다른 한 손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상화한 성화는 단연코 압권이었다. <그리스도(Christ The Saviour)>라는 제목의 이 성화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성화이다.

▲ 이드로의 우물(왼쪽)과 불붙는 가시떨기나무 ⓒ수해

도서관에 소장된 희귀본 성서와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의 귀중한 성화가 다량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 안에는, 뜻밖에도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친필 증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슬람의 침입으로부터 수도원의 안전을 약속한 무함마드의 손도장이 찍힌 친필 증서는, 세계 곳곳에서 방문한 순례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건립 초기에 쌓아올린 회색 화강암 성벽과 함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예배당이 지금도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안에는, 모세의 출애굽 여정과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수도원 뜨락 가득히, 베두인 목동들의 꾸란 독경 소리와 아름다운 선율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은은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박물관을 돌아 나온 순례자들은 무한한 감동을 느끼며, ‘이드로의 우물(모세의 우물)’로 향했다.

출애굽 당시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모세의 장인 이름을 딴 이 작은 우물은 모세가 그의 아내 치포라와 최초로 만난 장소이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지금도 수도꼭지를 틀면 맑은 샘물이 콸콸 쏟아져 흐르는 이드로의 우물은 여전히 수도원의 소중한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드로의 우물을 둘러보다가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온 베두인 목동들과 다시 만났다. 베두인 목동들의 주선으로 우리는 평소 모스크를 찾는 무슬림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어느 수도자와 만났다. 수도원의 유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수도자로부터 하산하는 길에 도서관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나서, 드디어 ‘불붙는 가시떨기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 딸과 결혼하고 광야에서 목동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떼를 몰고 가시떨기나무 앞을 걸어가고 있는 모세의 귀에 야훼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모세야,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거라.”

성서에서 가지 사이로 불꽃이 퍽퍽 이는데도 결코 타지 않았다고 전하는 이 가시떨기나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 시나이 광야에서만 서식한다고 했다.

야훼의 존재가 지구상에 현현했던 유일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 나무는 원래 수도원 안에 있는 ‘불붙는 가시떨기나무 예배당’ 중심에 있었지만, 예배당을 새로 정비하면서 밖으로 옮겨져, 지금은 호젓한 후원 한쪽에서 엄중히 보존되고 있었다.

▲ 선지자의 계곡을 따라 시나이 산을 오르는 순례자들 ⓒ수해

불붙는 가시떨기나무 예배당과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한 수도자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납골당을 관람하고 밖으로 나오자, 수도원 담벼락에 꽂혀 있는 각양각색의 종이쪽지들이 보였다. 살펴보니 수도원을 방문한 순례자들이 자신의 소원을 적어서 벽에 꽂아둔 것이었다.

우리도 각자 펜을 들어 시나이 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문을 적어서 담벼락에 꽂아두고, 막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며 시나이 산 등정에 관한 서로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현재 아랍어로 제벨 무사(Jebel Musa, 모세의 산)라고 불리는 해발 2,285미터의 시나이 산에 오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오래 전부터 수도자들이 수도원 뒤편에 3,750개의 돌계단을 쌓아서 만들어놓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베두인들에게 ‘40인의 선지자 계곡’으로 불리는 비교적 완만한 우회로였다.

잠시 간단한 논의 끝에, 올라갈 때는 선지자의 계곡으로 오르고 내려올 때는 수도자들이 쌓아놓은 돌계단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베두인 목동들이 마련한 에이쉬 빵으로 요기를 하고 나서, 약 1시간 30분쯤 정신없이 바위산을 오르다보니, 저 먼발치로 향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골짜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베두인 목동들의 설명에 의하면, 향나무가 서 있는 장소는 바로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야훼로부터 십계명(十誡命)을 받는 동안, 감히 거룩한 산에 함께 오를 수 없었던 12지파 제사장들이 모세를 기다리던 장소였다.

12지파 제사장들이 모세를 기다리던 장소는 엘리야 선지자와도 관련이 있었다. 엘리야 선지자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 신을 섬기는 예언자들과 한바탕 결전을 치른 후, 이제벨 여왕의 박해를 피해 이곳 시나이 산으로 도피하여, 바로 저 장소에서 야훼와 만났다고 한다.

향나무가 서 있는 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베두인 목동들은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양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을 권하는 미덕(美德)을 잊지 않았다. 굳이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생텍쥐페리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별을 따라서 오아시스를 찾아 유랑하는 베두인들의 마음씨가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목마른 나그네를 배려하여 마을 집집마다 대문 앞에 세워둔 물 항아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향나무가 서 있는 구약 시대의 성지를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산을 오른 지 약 2시간 쯤 지나자, 드디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센 파도처럼 물결치는 기이한 바위 봉우리들이 발밑에 좍 펼쳐진 산 정상에 서자, 그곳에는 이미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 베두인 마을의 물 항아리 ⓒ수해

일명 아브라함의 3대 종교라고 불리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모두 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가 야훼로부터 직접 전해 받았다고 전하는 율법(律法)을 근간으로 성립된 종교이다. 그래서인지 성서에서 호렙 산이라 불리는 시나이 산 정상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장소에 세워진 성당뿐만 아니라, 소규모의 이슬람 모스크도 나란히 서 있었다.

바야흐로 시나이 광야를 붉게 물들이던 장엄한 일몰의 순간이 지나자,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자리에 모여 축복의 노래를 부르던 순례자들도 하나둘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잉크빛 어둠이 내리는 적막한 산 정상에는 이름 모를 평온이 찾아왔다.

이슬람 모스크 옆에서 컵라면과 음료를 판매하는 무슬림 상인들의 배려로 우리는 모두 두툼한 양털 가죽을 하나씩 뒤집어쓰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발밑에 펼쳐진 ‘성지와 분쟁의 땅’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시나이 반도의 진면목을 묵묵히 응시했다.

1956년 발발한 수에즈 전쟁 때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가 1982년에야 가까스로 이집트에 반환된 시나이 반도는 고대로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육상통로일 뿐 아니라, 유럽 대륙이 지중해와 연결된 홍해를 거쳐 인도양을 따라서 동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해상 통로이자 문화의 교량 역할을 하던 곳이다.

한 가닥 곱게 풀어놓은 연분홍 띠처럼 시나이 반도를 에워 두르고 있는 홍해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각자 개인적으로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는 종교적 성향과는 관계없이 모세의 생애와 십계명에 관한 소회를 토로하다가, 앞으로의 여정에 관해 구체적인 의견을 나누었다.

일단 모세의 출애굽 여정을 따라가고 있는 이탈리아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하산 즉시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도서관을 방문한 후에, 국경도시인 누웨바(Nuweiba)로 달려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누웨바 항에서 배편으로 요르단의 아카바(Aqaba) 항으로 들어가, 곧장 느보 산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다가, 요르단의 느보 산에서 ‘머나먼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며 12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순례자의 계획을 듣고 난 이집트 청년들은 지금부터 요르단을 경과하여 이스라엘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나는 막연히 그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들어가려니 짐작하고 있었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탈리아 순례자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청년이 이슬람의 5대 강령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일명 ‘무슬림의 다섯 기둥’이라고도 불리는 이슬람의 5대 강령에 따라 그들은 지금 성지순례를 나선 길이었다.

▲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자리에 세워진 성당 ⓒ수해

무슬림이라면 평생 누구나 한 번은 의무적으로 행하는 성지순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 무함마드의 고향에 있는 이슬람교의 제1성지)와 메디나(Medina, 무함마드의 무덤이 있는 이슬람교의 제2성지)이다.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무슬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한 곳의 성지는 예루살렘의 황금사원(Dome of the Rock, 바위사원)이다.

이슬람 전설에 의하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서도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돈독히 추앙받고 있는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메카에 들어가 카바(Ka'bah)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무함마드가 임종한 지 불과 몇 십 년 후에 건설된 예루살렘의 황금사원 안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무슬림들은 그곳에서 무함마드가 승천(昇天)했다고 믿는다.

성서 고고학자를 희망하는 세 청년은 해마다 한 차례씩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지난해의 하즈(Hajj, 메카 순례)에 이어 올해는 느보 산의 모세 기념성당과 예루살렘의 황금사원을 순례할 예정이었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이윽고 나에게 이 길을 걸어가는 동기와 목적을 물었다.

나의 동기와 목적은 간단하다. 나는 현지답사를 통해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정신적 스승인 공자, 석가, 예수, 무함마드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문화적 배경을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도 불구하고, ‘문명충돌론’이 아닌 ‘문명교류사’의 관점에서 공자, 석가, 예수,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을 새롭게 조명해 보기 위해, 중국 최남단에서 출발하여 광활한 인도 대륙을 휘돌아서 아프리카까지 들어온 긴 여정을 한꺼번에 다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나 역시 최종목적지는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상정해놓고 있음을 밝혔다.

느보 산을 답사한 뒤, 일단 1차 현지답사를 마치고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귀환할 예정이었던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내친김에 세 청년과 함께 이스라엘까지 답사하기로 결정하고 나에게도 동행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구약과 신약을 매개하는 수많은 성지가 산재해 있는 요르단 전역을 순례한 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먼저 순례하고 이스라엘로 들어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약속은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요르단까지만 동행하고, 인연이 있으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베들레헴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일행은 특별히 크리스마스 이브를 베들레헴에서 맞이하려는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물론 있었다. 그것은 1923년 러시아의 탐험가이자 인류학자인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예프가 펴낸 한 권의 책 때문이다.

▲ 어둠과 함께 묵상에 잠긴 시나이 광야와 홍해 ⓒ수해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 책의 제목은 <데르수 우잘라(Dersu Uzala)>이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원주민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의 삶을 통해, 정복과 승리 대신 공존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야생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데르수와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나는 이 낯선 대지 위에서 무사히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무렵의 고대 로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 대제국은 당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밖으로는 북방의 야만인들에게 위협을 받고, 안으로는 퇴폐적인 풍속으로 밑바닥부터 곪아 있었다.

이처럼 황폐한 시대에 저 멀리 팔레스타인에서 구원의 빛이 등장했다. 그 빛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쳤고, 불멸의 삶을 꿈꾸게 했다. 그 빛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나는 병사들에게 그리스도의 위대한 가르침에 대해 말해줬다.

병사들은 내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동방박사를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인도했다는 카시오페이아 자리도 관찰했다.

시호테알린의 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히려 어둠을 통해 낮에 보지 못한 세계를 만났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의 속삭임이 끝없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 순간이 바로 평안이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토록 순수한 야생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바라던 빛이었다.”

그동안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관한 문헌을 부분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저명한 종교학자도 신학자도 아닌 탐험가 아르세니예프의 저술만큼 나에게 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실하게 느끼게 해준 글은 없었다. 내가 모세의 여정을 따라서 이집트에 들어온 까닭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미리 보여준 선지자 모세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어쩐지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되지 않은 맨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이 깊을수록 산 정상에는 뼈마디가 시리도록 매서운 혹한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어둠과 함께 깊은 묵상에 잠긴 시나이 광야를 바라보면서 나누는 우리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논의가 깊어지자,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지나치게 배타적인 율법 원리주의와 무슬림들의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를 바라보는 회의적인 시각에 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서로 다른 문화 풍토에서 성장한 일행들의 견해는 더러 상반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매번 굵직한 국제분쟁의 단초를 제공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각종 폐해를 종식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한 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라.”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 이번 회로 수해 스님의 ‘지중해 파노라마’ 연재를 마칩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 곳곳을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과 성지 이야기를 따듯한 필치로 펼쳐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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