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1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첫째로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그리고 가나안 사람 시몬과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태 10,1-4)

오늘 단락의 중요한 단어인 1절 ‘권능’(exousia)은 4,23; 9,35을, ‘영’(pneuma)은 8,16을 마태오는 기억하여 참조하였다. 열두 제자 명단은 마르코 복음서 3,16-19을 대본으로 하였다.

이스라엘의 위기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열두 제자를 파견함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로마 군대 치하의 식민지 신세이기도 하지만 더구나 이스라엘 지배층이 백성을 잘못 인도한다고 예수는 생각하였다. 예수는 로마 군대에 저항할 뿐 아니라 동족 지배층을 비판하였다. 즉, 로마 군대와 동족 지배층 둘이 예수의 적대자다. 대부분 신학서적이나 설교에서 로마 군대 부분은 적절히 균형 있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

열두 제자는 마태오 복음의 오늘 단락에서 처음 등장한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12 부족을 상징한다는 것을 마태오는 알고 있다(마태 19,28).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다. 예수에게 열두 제자가 있다는 것을 마태오는 전제한다. 마르코 복음서 3,13-15와 달리 열두 제자의 구성 자체를 마태오는 언급하지 않고 그들에게 주신 권능을 다루고 있다. 기적을 행하는 제자(mathetes)의 권능은 마태오 복음에서 이곳에만 보인다.

▲ ‘사도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 두초의 작품(1311년)

초대교회 오리제네스 이후 숫자 12의 상징에 대해 12 천사군단, 하루 12시간대, 완전한 숫자 12, 12 부족 등 여러 제안이 있었다. 사도(使徒, apostolos)라는 명칭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제자로서 존재를 상징한다. 즉 제자들은 예수가 하는 일을 그대로 따라서 하라는 뜻이다. 예수가 하지 않은 일을 제자들이 해서는 안 된다.

마태오 복음서 4,18-22에서 언급된 4명의 제자가 12 제자 명단에서 먼저 나온다. 그들은 두 쌍의 형제들이다. “시몬”은 이름이 아니라 직분을 뜻하는 호칭이다(마태 16,17; 17,25). 마르코 복음서와 다르게 마태오 복음에서 베드로는 처음부터 “시몬”이라는 호칭으로 나타난다(마태 4,18; 8,14). 12 제자 중 마태오는 세리다(마태 9,9). “가나안 사람 시몬”으로 우리말로 흔히 번역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를 마태오 저자는 지명 ‘가나’로 생각한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카나이오스(kanaios)가 적절하다. 가나안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지도 않다. 루카 복음 6,15; 사도행전 1,13처럼 히브리어 뜻을 참조하여 ‘열혈당원’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열혈당은 로마 군대에 무력투쟁으로 저항한 독립운동 단체 젤로데파를 가리킨다.

“시몬”과 “이스카리옷”은 해석하기 아주 곤란하다. (“시몬”은 나중에 마태오 복음서 16,17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스카리옷”을 유다 지방 이스카리아(Iskaria) 마을 출신으로 마태오는 생각한 것 같다. 케로이트(keroith)는 여호수아기 15,25에서 유다 지방 마을로 나타난다. 라틴어 시카리우스(sicarius : 칼, 단검)에서 추측하여 유다를 젤로데파 소속으로 해설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 의견에 찬성하기 어렵다. (마태오 복음서 26,14-16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를―돈 욕심, 정치노선 등 갖가지 추측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장 어려운 해석은 “첫째”(protos)라는 단어다. 2절의 그 단어가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개신교 · 가톨릭 공동번역, 1977)에서 빠진 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고 우선 지적하고 싶다. 라틴어 번역 성서(Vulgata)는 ‘첫째 시몬’(primus simon)이라고 옮겼다.

베드로가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제자로 초대된 사실이 교회 역사에서 중요하였다. (‘교황’ 문제는 마태오 복음서 16,18에서 다루겠다.) 베드로의 ‘특권’(meritum)은 예로니모 이후 그 근거로 주장되었다. 16세기부터 그 문제는 크게 논란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로토스(protos)가 마태오 복음서에서 왜 언급되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베드로가 예수 역사에 대한 생생한 증인이어서 그랬을까.

열두 제자에 대한 오늘의 단락에서 우리가 얻을 정보와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째,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다. 열두 제자에서 그리스도교를 곧장 연상하지 말고 이스라엘과 그리스도교의 연결을 먼저 느껴야 하겠다.

둘째, 예수 운동은 갈릴래아 어부와 농부를 중심으로 한 시골 빈민운동이다. 예수는 수도권 사람을 중심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셋째, 예수 운동은 유랑운동이다. 가난한 사람을 직접 찾아가는 운동이다.

넷째, 예수 제자들의 인적 구성은 다양하다. 로마 군대에 협조한 세리도 있고 로마 군대에 무력투쟁한 젤로데 소속도 있다. 베드로처럼 예수를 배신하였으나 뉘우친 제자도 있고 유다처럼 예수를 결국 배신한 사람도 있다. 권력에 눈이 어두운 제자들도 있었다. 열두 제자 내부의 갈등도 더 연구해야 할 주제다.

다섯째, 열두 제자는 모두 남자요 유다인이었다. 여기에서 여성 성직자를 거절하는 가톨릭의 전통이 시작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신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마태오가 열두 제자를 언급했다고 해서 다른 제자들이나 공동체를 외면하진 않았다. 열두 제자는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위한 희생공동체다. 열두 제자는 어느 모로 보나 로마 군대와 유다교 지배층의 미움을 살만한 조직이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한 예수와 그들의 갈등은 서서히 시작된다.

12 제자단 구성에서 가장 먼저 그 점을 우리는 눈치 채야 한다. 교회 제도 문제는 다음다음 문제요 후대의 일이다.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유리하게 해석할까, 교파적 이해관계에 얽매지 말고, 먼저 당시 사정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에 대해 가톨릭이 특허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개신교가 예수에 대한 독점권을 지닌 것도 아니다. 예수는 인류 전체의 보배다. 종파적 욕심으로 예수를 슬프게 하지 말라.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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