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4]

▲ ‘삼위일체’, 캉팽(Robert Campin)의 작품, 1433년
부활하신 예수는 메시아로 일컬어진다. 이스라엘은 인간을 대신해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해결사인 왕,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은 메시아다.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준 메시아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사는 나라가 발생한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예수는 왕이신 메시아인데 그 왕국에서는 사랑이 실천된다. 왕국의 신민(臣民)들은 왕이 제시하는 원리를 따라 산다. 예수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을 변하게 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변하는 나라, 곧 서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준 메시아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진다. 물론 천상의 호적을 본 것도 아니고, 하느님과 예수의 DNA를 검사하여 친자 확인을 하고 하는 말도 아니다. 예수를 지배하고 있던 ‘아빠’ 체험, 곧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그분의 삶을 회상하면서, 초기 신앙인들이 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을 높이는 말이 아니다. 김정은을 김정일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김정은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의 존재를 하느님과 관련시켜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 신앙고백으로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고, 그분의 실천들은 그 생명의 발로였다고 고백한다. 예수의 제자 된 사람도 같은 놀이를 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산다고 그들은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될 수 없고, 아들은 아버지가 되려 하지 않는다. 창세기 2-3장의 창조설화(創造說話)에서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하였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창세 3,5) 될 것을 그들은 탐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아들 혹은 자녀는 아버지 혹은 부모의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 혹은 부모가 함께 있는 것이 좋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배워서 같은 생명을 산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은 형제자매를 또한 사랑한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을 묻는 율사에게 예수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 뜻을 알겠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마르 12,28-34)

초기교회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때, 예수는 이미 그들을 떠난 다음이었다. 초기교회가 발생시키는 그분에 대한 회상의 말들 안에 그분의 흔적만 남아 있다. 흔적은 확실한 것이지만, 자유로운 해석에 노출되어 있다. 메시지를 발생시킨 사람이 무섭게 군림하면, 사람들은 자유를 잃고 복지부동(伏地不動)한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는 왜곡된다. 예수는 살아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순종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초기교회는 예수의 죽음이라는 수수깨끼를 이해하기 위해 제2이사야서를 참고하였다. 고통당하는 야훼의 종은 하느님을 조작(操作)하여 자기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속 종교들이 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기복적 욕구에 영합하기 위해, 신앙을 기복적인 것으로 변질시키면,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이 사라진다.

종교들의 제사(祭祀) 의례는 신에게 무엇을 바쳐서 더 큰 혜택을 얻어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 스스로가 변하여 하느님을 긍정하고, 자기 안에 하느님을 살아계시게 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나 하느님 덕분으로 사람이 재물을 얻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길이 아니다. 예수를 왕으로 부르고 그분이 살았던 가정을 성가정이라 부르는 것은 예수의 신분이나 그분의 출신 가정을 높이지 않는다.

후에 니체아 공의회(325년)는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아리우스(Arius)의 위험 앞에 “아버지와 아들은 실체적(實體的)으로 동일하다”고 표현할 것이다. 예수의 삶 안에 하느님 아버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실체)이 주어졌다는 말을 그 시대의 철학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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