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16]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지난 주일 이 시간에는 우리 사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고 조롱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신 말씀이나,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현실하고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좁은 문’은 무자비한 경쟁에서 이겨서 통과해야 할 출세의 문일 뿐이고,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를 장악한 ‘폐쇄된 지배집단’은 불의든 불법이든 개의치 않고, 그 첫째 자리를 독차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물림하고, 보통의 시민은 꼴찌 자리로 추락하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는 그 빈곤과 고통의 꼴찌 자리를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맨 얼굴입니다. 겉으로는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국민소득 몇 만 불을 노래하고, 곧 경제강국이 될 것이라고 노래하여, 마치 없는 것이 없는 풍요로운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대다수의 시민과 사회적 약자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이 조롱당하고 무시당해도, 참된 사회화와 인간화의 ‘복음화’는 실종되고 있는데,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외면하고 침묵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 현실을 옹호하며 강화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은 그저 떠나야 할 죄악이 넘치는 세상의 일이고, 주님의 말씀은 천상의 고결한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에 세상일과 섞여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는 사이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뜻은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고 공허한 말잔치로 전락합니다.

교회의 창립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좋은 게 좋은 것’인 식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 받는 표적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힘 센 이들, 첫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인 바리사이들의 지도자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그것도 무모하리만큼 순진하게 대들었습니다. 루카 복음 14장 2절부터 6절의 내용은 안식일 규정을 내세워, 그렇지 않아도 식민지배로 고통 받는 보통의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고, 더 나아가 그 틈에 자기 잇속 챙기려 했던 바리사이들의 지도자를 꾸짖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루카 14,7-14)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자리를 차지하려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돌보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아니,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딛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그들을 꾸짖습니다.

만일 교회가 겉으로는 창립자의 정신을 칭송하고 화려한 성전과 거룩한 전례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는 이’들과 ‘부유한 이웃’과 함께 잔치를 즐기고, 대신 ‘자신을 낮추는 이’, 아니,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는 이’,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연명할 수 없는 이’, 곧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막는다면, 이는 “약도 없는 거만한 자의 재난”이 될 것이며,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 내렸기 때문”(집회 3,28)일 것입니다.

교회가 지금 있어야 할 곳, 그리스도인이 지금 눈을 뜨고 바라봐야 할 곳, 마음으로 함께하고, 그 몸이 있어야 할 곳은 사후(死後)에 만날 천상의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세상의 불의한 경제성장, 탐욕의 풍요로운 잔치에서 내쫓겨, 부자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로라도 연명해야 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런 보답을 받을 수 없는 그곳에서 교회는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그들이 가난한 것은 무능함과 게으름 탓이니 퍼주기만 하면 버릇만 나빠진다고. 장애는 그 사람 숙명이고 팔자인데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동정하고 후의(厚意)를 베푸는 것에 고마워해야지, 권리를 주장하다니 배은망덕하다고.

만일 그렇게 믿는다면, 그래서 힘없고 약한 사람에게 해줄 것이 별로 없고, 해줄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이 고백하는 예수님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고통을 외면하는 바리사이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을 엄하게 꾸짖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꾸짖는 정도가 예수님같이 고매하신 분이 하셨다고는 믿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보고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둠으로 내던져져 그곳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말 듣고 가만히 있을 바리사이, 율법학자, 원로들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창립자이신 그리스도의 가난과 고통을 알아보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특히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과 재능을 갖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고,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라고,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실현하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그 사람들도 교회가 사랑해야 할 하느님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창립자이신 주님께서 주신 교회의 사명, 곧 ‘세상의 복음화’ 사명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미사(9월 1일, 연중 22주일)를 봉헌하면서 그 시작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새 계약의 잔치로 부르시니, 이 식탁에 앉는 모든 이가 한 형제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가 보잘것없고 고통 받는 이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소서.” 아멘.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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