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3]

▲ ‘성령강림’, 엘 그레코의 작품(1596)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시기적으로 분리한 것은 사도행전을 쓴 루카가 한 각색이었다. 사도행전은 루카 복음서의 후편이다. 부활, 승천, 성령강림을 시간적으로 분리한 것은 그 시대의 우주론(宇宙論)에 충실하기 위한 각색이었다. 하늘, 땅, 죽음의 나라, 그렇게 3층으로 된 우주관의 시대였다. 예수는 지상에서 죽어서, 죽음의 나라인 지하세계(지옥, 고성소, 저승 등으로 표현되었음)로 갔다가 부활하여 지상으로 돌아오고, 승천하여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성령강림은 예수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였듯이, 그 함께 계심에 충실한 사람들 안에도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들의 활동에 대해 말하기 전에 사도행전은 서론으로 두 폭의 그림을 만들어 실었다. 승천의 그림(사도 1,6-11)으로 예수가 사도들을 떠나가셨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사도들은 일해야 한다. 승천은 예수라는 역사적 개별성을 지닌 인간이 그 개별성을 넘어서 하느님의 보편성 안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루카 24,51). 예수가 보여준 삶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게 한다는 말이고, 예수는 지도자로 이 세상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다.

성령강림의 그림(사도 2,1-13)은 사도들이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신앙은 이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바벨탑의 이야기와 같이 모두가 한 사람 밑에서 하나의 언어를 강요당하고, 제도로써 규격화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고유한 방식으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서는 그 사실을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4,24)고 표현하였다.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은 시나이 산에 야훼가 내려오신 장면의 묘사(탈출 20,18)에서 가져왔다. “불같은 혀들”은 이제부터 일어나는 교회의 복음 선포가 사람들에 의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기원을 둔 말씀 사건, 곧 말씀으로 말미암은 놀이의 발생이라는 것이다. 사실 초기교회의 복음은 여러 가지 불가능함을 넘어서 불길 같이 전파되었다.

성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는 인간적인 가치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 혹은 세상의 일상성(日常性)을 넘어서는, 비범하고 예외적인, 기적과 같은 현상에서 성령을 찾지 말아야 한다. 개체 유지와 종족 유지의 차원을 넘어서는 자비와 사랑이 동기가 된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실천들 안에 성령, 곧 하느님의 숨결을 보아야 한다.

부활과 성령강림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부활이 확인의 언어로써가 아니라, 증언의 언어로써만 표현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삶의 변화와 더불어서 체험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같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변할 때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우리가 그분에 준해서 새로운 실천을 할 때만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이 확인되는 장소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탈출 33,19 참조) 인간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령강림과 바벨탑 이야기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다른 언어로 말을 하고, 모여든 군중은 사도들이 자기네 지방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것은 복음이 다양한 언어의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다는 뜻이다. 한 인간 예수 안에서 발생한 복음이지만, 이제부터는 인간 개체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다.

사실 초기 신앙공동체가 발생시킨 예수에 대한 회고, 즉 복음은 그분의 생애를 알리는 양식으로 기록되었지만, 그분의 말씀과 실천이 초기 신앙인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와 그들 안에 일어난 삶의 변화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 그 말씀과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들, 곧 삶의 변화가 그들에게 준 구원에 대한 체험을 전달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약성서 안에서 찾아야 하는 사실(史實)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지만, 문화와 민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 민족, 각 계층, 개인 각자의 고유함 안에서 복음은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획일성을 좋아하고, 다양성 앞에는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낀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이 법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한 공동체의 지도적 역할을 맡은 사람에게 두려움과 획일성에 대한 욕구는 더 강해진다. 특히 종교집단의 지도자들은 그 획일성을 하느님으로 포장하여 강요한다. 두려움과 획일성에 대한 욕구는 지도적 역할을 맡은 개인의 열등의식(劣等意識)과 정비례하기도 한다.

그 사실을 지적하여 말하는 바벨탑의 이야기이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1-4). 모두가 같은 말을 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뭉쳐서 살게 하겠다는 인간의 욕구이다. 하느님은 그런 획일적 인간 사회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바벨탑의 이야기이다. 각자 자기의 말을 하고, 각자 자기의 놀이를 하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바벨탑을 쌓겠다는 유혹은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 안에도 많이 있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완벽한 율법 준수를 강요하면서 추구한 바도 바로 그런 획일성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과 제물 봉헌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은 하느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으로 그들은 포장하였다. “불같은 혀들이 …… 그들 각자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또 사도들의 말을 “그들 각자는 자기네 지방 말로”(사도 2,6) 알아들었다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은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차이가 풍요로움으로 보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각자 안에 다양한 모습을 만드신다. 사실 가장 인간다운 사회는 각자의 다양함이 풍요로움으로 보이는 사회이다. 신앙인의 모습과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신앙인은 성령 안에서 같은 생명의 기초를 발견한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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