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7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쳤을 때 군중은 그 가르침에 대해 놀랐다. 그들의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진 자처럼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뒤따랐다.” (마태 7,28-8,1)

복된 선언의 마지막 부분인 오늘 단락은 산에서 말씀을 시작하는 마태오 복음서 4,25를 의식한다. “예수가 이 말씀을 마쳤을 때”는 11,1; 13,53; 19,1에 다시 나타나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모두 마치시고”(26,1)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 구절은 모세의 예를 본뜬 것이다〔“모세가 이 모든 말을 마쳤을 때”(신명 31,1; 31,24; 32,44-46)〕.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서 이적으로 말씀을 증명하는 다음 부분으로 옮아가는 단락이기도 하다. 마태오 복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권위(exousia)라는 단어가 등장한다(9,6.8; 10,1). 마태오는 능숙한 편집 실력을 발휘한다. 성서 어디에서도 마태오는 생각 없이 단락을 배치하지 않았다.

모세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도 군중을 향한 것이다. 군중의 놀라운 반응이 곧 그들의 신앙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탄복하는 사람들 모두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에는 뇌세포 활동만 요구되진 않는다. 믿음은 먼저 심장이 움직여야 한다.

Cosimo Rosselli, 1482

마르코 복음서 1,22와 달리 “그들의 율법학자”라는 표현을 마태오는 보충하였다. 예수의 제자들과 유다교 지도자들 사이의 벌어진 거리를 나타내려는 마태오의 의도다. 산 사나이 예수가 산에서 내려오고 군중이 뒤따르는 모습은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를 연상시킨다(탈출 19,14.25; 34,29). 군중은 그들의 유다교 지도자와 예수 사이에 서 있다. 군중은 이제 누구를 선택할까. 성서에서 군중(okloi)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드문 편이다.

예수의 복된 선언이 오늘의 단락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말씀은 누구를 향하는가. 일부 신자―수도자, 성직자―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설한 가톨릭의 전통적 입장은 적절하지 않다. 복된 선언은 그리스도교 신자 모두에게 하는 말씀이다. 복된 선언은 과연 지킬 수 있는가. 복된 선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지만 그 실천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가 실천을 장담할까.

그보다 실천 자체를 아예 거절하는 사람들이 사실 더 많다. 성서 말씀이 자기 삶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예수 시대 군중만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우리도 여전히 예수의 말씀에 놀란다.

예수의 복된 선언에 현대 유다교 지식인들도 놀란다. 유다교 문헌에 복된 선언에 해당되는 구절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간디는 복된 선언 마태오 복음서 5,39에 크게 감동받았다. 톨스토이는 복된 선언에서 사회주의의 씨앗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라는 책을 쓴 맑스주의자 맥호벡도 비슷한 경우다. 복된 선언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그 선언에 감동받아 삶이 바뀐 사람들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 내가 하지 못했다고 해서 남들도 역시 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은 어리석다.

복된 선언은 오늘날의 교회 조직과 운영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요구한다. 우선 가톨릭교회를 살펴보자. 오늘 가톨릭교회의 위기는 크게 보면 첫째, 성직자의 위기, 둘째, 구조의 위기다. 자주 언급되는 문제들―성추문, 교황청 부패―은 성직자들과 연결된 문제다. 훌륭한 모범적 개인―이태석 신부, 마더 데레사―의 예로써 구조의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성직자들의 추문에 대한 언론 보도에 신도들은 분노와 허탈감으로 당황한다.

한국 가톨릭 성직자들의 삶은 빠르게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가난이나 희생과는 거리가 있는, 세계 어디서도 보기 드문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누린다. 한국 시골 성당의 신부도 새 교황보다 더 안락한 삶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도 수는 늘고 있지만 부자 편으로 더 기울어가는 한국 가톨릭교회다. 상대평가에서 가톨릭이 1위 한다고 우쭐대지만 절대평가에서도 과연 그럴까. 자기개혁에 몸부림치는 개신교보다 위기의식이 아예 없는 가톨릭이 사실 더 큰 문제다.

신학은 불의한 세상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하여 자기희생으로 끝난다. 교회도 성직자도 그렇게 사는 길이 옳다. 예수의 복된 선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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