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 적에 ③ 여덟살에서 열살 때(1947-1949)

 


• 할아버지 : 나는 여덟 살이 되자 봉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수배중이셨던 아버지는, 나를 위해 평생을 써도 끄덕없을 군인 헬멧재료로 만든 플라스틱(!) 책가방과 멋진 가죽 구두를 일찍부터 마련해 놓으셨어.

아마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책가방과, 여느 아이들은 고무신도 제대로 못 신던 시절에 가죽 구두라니, 으쓱댈만했지. 소풍날이었어. 봉화 서천계곡으로 갔는데, 그 대단한 책가방에 도시락과 과자 따위를 넣고, 가죽 구두에 새옷을 입고 으스대다가, 물이 흐르는 이끼 낀 바위에서 쭈르르 콰당탕 물에 빠져 가방도 구두도 새옷도 나도 몽땅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으니…… 나는 엉엉 울었고 담임 선생님이 나를 달래주셨던 일이 기억나는군. 으스대다가 된통 당한 거지.

우리 집 앞에 누에고치 공장이 있었는데, 한 해에 얼마 동안 고치실을 풀어내는 일을 마치면, 거의 한 해 내내 빈 창고였어. 거기서 가끔 활동사진(영화)이나 유랑극단이나 마술 따위를 공연했었지. 입구 쪽에는 커다란 멍석을 걸어서 막아놓고, 좁은 출입구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표나 돈을 받고 있었어. 표도 돈도 없던 우리 어린이들은 그래도 미련을 갖고, 문지기 아저씨의 자비를 바라면서 끈질기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대개는 거의 끝날 때쯤 공짜로 들여보내주었지. 그런데 언젠가는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도 들여보내줄 낌새가 없자, 우리 어린이들은 이심전심 작당을 해서 그 멍석을 밀고 들어간 적도 있었어.

• 슬기 : 거의 다 끝나가는데 들어가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 할아버지 : 그때는 그게 우리 놀이였으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억나는 한 장면은, 내가 교단에 나가 국어교과서 외우기 대회(?)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박수갈채를 받은 일이야. 이때만 해도 내 성격이 외향적이었던가 봐. 머지않아 내성적으론 바뀌었지만……

• 할아버지 : 그즈음 아버지는 밤중에 나 몰래 오시는지 몰라도 전혀 뵐 수가 없었어.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어야 할 입장이라, 봉화에서는 눈총도 많고 해서 외가가 있는 영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지. 영주 하망동 쇠전거리 안마을에 있던 외삼촌 소유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어머니는 시장통에 집을 빌려 묵밥집을 하셨어. 나와 형은 영주 중부초등학교(지금의 영주 중암초등)로 전학하고.

그런데 최씨 성을 가진 총각경찰이 수시로 우리 묵밥집을 찾아와 묵밥을 사 먹기도 하고, 어머니를 보고 ‘누님’이라고 부르곤 했지. 언젠가는 ‘누님, 누님, 날 장가보내쥬…’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 우리 형제들에게는 무척 잘 해주셨지. 나중 생각이지만 그 총각경찰이 아버지 일로 어머니와 우리집을 밀착감시하는 정보형사였는지 몰라. 늘 사복을 입고 있었거든. 아니면, 처음엔 밀착감시를 했지만, 점차 우리 가족과 정이 들었는지도 모르지.

• 슬기 : 해방 이후 1947년까지 좌우익 갈등으로 죽은 사람이 40만 명 넘었대요.
• 할아버지 : 1946년 10월에 대구에서만도 6만 명 이상이 죽었지.
우리집도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당분간은 조용한 듯 했어. 살벌한 시절이었지. 내가 가출(家出)을 시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어머니의 심한 꾸중과 매를 맞은 적이 있었어. 무슨 이유로 가출을 시도했는지 모르지만, 추측컨대 어머니가 못마땅하여 어머니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겠지. 그 유명한 플라스틱(!) 가방에 책 따위를 챙겨 헛간에 숨겨두고 탈출기회를 노리다가 들통난 거야. 초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니까, 나도 일찍부터 가출 기질이 있었던가 봐.

• 슬기 : 다시 시도하지는 않으셨어요?
• 할아버지 : 안 했어. 못 했는지 모르지만! 미수에 그쳤으니 전과자는 아니지?! 우리가 살던 집은 남향으로 일자(一字) 기와집이었어. 왼쪽(동)으로는 바로 제방이 있고, 앞(남)마당 끝에는 영주-봉화간 철길이 제방 위로 지나가고 있었지. 그리고 기와집 오른쪽(서) 한켠에는 작은 흙초가집 아래채가 있었는지, ‘나가는’길은 그 초가집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그 집을 반 바퀴 돌아 밖으로 나가는 골목길 뿐이었어. 물론 왼쪽이나 맞은 쪽 제방, 또는 뒷마당 생울타리 나무 사이로 나다닐 수는 있지만, 그건 상용 출입구 아니었지. 내 얘기가 감이 잡히니?

• 슬기 : 알 듯 말 듯 해요. 할아버지!
• 할아버지 : 이 집 위치 따위를 제대로 알아야, 내가 지금부터 할 얘기를 잘 알아들을 수 있을 테니, 내가 우리집 도면을 그려 볼께. 물론 집들은 제방보다 4-5미터쯤 낮았지. 이 도면을 1961년 7월 영주 수해 이전의 지형이야. 수해 때 영주천 제방이 터져 그 후 영주천을 시 외곽으로 돌려 서천이 되었느니, 지금 영주의 모습을 그때와는 많이 다르지  (다음에 계속)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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