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국정조사 청문회를 보면서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8월 16일 나란히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증인선서 거부를 두고 “떳떳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냐고 윽박질렀지만, 국가안보와 법질서 확립을 다루었던 수장들은 한사코 ‘법’을 이용해 ‘증언도 아닌 증언’을 한 셈이다.

이날 <연합뉴스>에서는 “국정원 국조 증인 원세훈 ‘차분’, 김용판 ‘여유’”라는 관전평을 담은 기사를 내보냈다. 제목처럼, 김용판은 웃음을 머금은 채 검찰 조사에 항변하고, 원세훈은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평소 잘 착용하지 않던 뿔테 안경까지 쓰고” 증인석에 나와 시종 두 손을 깍지 끼고 선택적으로 답변했다.

예상한 대로 원세훈 전 원장은 선거 개입 혐의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며 강한 어조로 반박하며, 대부분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겠다”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김용판 전 청장은 자신은 “떳떳하고 당당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검찰의 공소장 전제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뺌했다.

19일 증인심문에서 ‘국정원 댓글녀’는 가림막 뒤에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국정원 차장으로부터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고 야당 후보를 반대하는 댓글을 올리라는 지시를 받았느냐”고 묻자 ‘차분한 말투로’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검찰조사만으로도 밝혀질 만큼 밝혀졌는데도 이들이 국회에서 한결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별 탈 없는 것을 보면, 박원순 서울시장의 일갈밖에는 인용할 말이 없다. 박 시장은 19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면서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동안 이들이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목구멍에 밥을 넘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불교의 ‘오관게’(五觀偈, 공양게)가 통절하게 이들을 꾸짖고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잘 살펴라.
공양을 받기에는 네 덕행이 부끄럽다.
우선 마음을 다스려 탐심을 버리라.
몸 여윔 치료하는 약인 줄을 바로 알아
도를 닦기 위해서만 이 음식을 받으리.”

<내 인생의 절밥 한 그릇>에서 시인 김사인은 “밥과 ‘밥 먹음’은 다소 부끄러운 어떤 것”이라고 했다. 법당에선 비우고 내려놓음이 본분이지만, 식당에선 거꾸로 채워 들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법당에서 절을 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 우주에 미만한 목숨과 불성 앞에서 참회하고 용서를 청한다. 스스로 위로받고 또한 새로운 다짐을 행한다. 그래서 절은 “섧고 맑다”고 했다.

이러한 수행은 식당이라도 멈출 리 없다. “이 세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밥인 듯 나는 부끄러운 입 쪽으로 한 숟갈씩 밥을 모셔들인다. 밥알 하나하나를 온몸으로 맞는다. 숨죽인 울음 같은 그것, 그 떨림과 숙연함과 충만함을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김사인은 “그것은 마음을 다해 절을 올릴 때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누구는 법(法, 진리)을 얻기 위해 밥을 성심껏 먹는다. 그런데 누구는 법(法)을 우롱하기 위해 밥을 먹는다. 국정원장과 서울경찰청장, 그 직함만으로도 거창한 ‘법 정신의 화신’들이 도리어 꾀를 내어 법을 우롱하고 국회를 우롱하고 결국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성바오로딸수도회는 식사 중에 언제나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먹고자 하는 이 음식과 우리에게 축복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국정원과 서울경찰청장이 ‘국민을 섬기기 위하여’ 먹고자 하지 않고, 권력을 위해 공권력을 남용하고, 국민 앞에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면 그들이 먹은 밥이 오히려 그들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김사인은 ‘마주앉은 음식에도 생애와 애환이 있다’고 했다. 내가 그러하듯, 밥알 하나하나도 모두 어미, 아비, 동기간이 있고, 제 고향이 있는 존재이며, 땡볕에 목을 그을리며 바람과 벌레들과 희롱하던 한 시절이 일을 법한데, 우리는 그것들을 죽여 음식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국정원장과 서울경찰청장과 ‘댓글녀’를 먹여 살린 세금에도 갖은 애환이 깃들어 있다. 호사가의 반들반들한 지폐도 있겠지만, 시장골목 아낙의 때에 전 돈의 일부가 세금이 되어 그들 주머니로 들어갔을 것이다. 수행자의 탁발이든 서민의 음식이든, 공무원의 밥상이든 결국 눈물겹지 않은 밥은 없다. 그 밥을 먹던 입으로 지극히 차분하게, 지극히 여유롭게 ‘거짓’을 행하는 자의 입술 언저리에 파리가 꼬인다. 고름 잡힌 입술이 촛불에 데면 나을는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 사건은 단순히 민주주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구원’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은 예수를 팔았던 유다처럼 목을 매지도 않았다. 베드로처럼 통곡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빌라도처럼 손을 씻지도 않았다. 그들은 국회 증인석에 앉아서 여전히 ‘떳떳하고 당당하게’ 유세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불법’에 힘입어 권좌에 오른 대통령은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묵언수행 중’이다. ‘다 지나가리라!’ 믿으며 묵시록을 읽고 있다. 아침에 챙겨먹은 밥이 아직도 이들 뱃속에서 안녕한지 궁금하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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