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5

“15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여러분에게 오지만 속은 사나운 늑대입니다. 16 그들이 맺은 열매로 여러분은 그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습니까? 17 이처럼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20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행실을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 22 많은 사람들이 그날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 우리가 당신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23 그때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여, 내게서 물러가시오.’” (마태 7,15-23)

15-20, 21-23은 구성이나 시간 구조로 보아 서로 독립적인 두 부분이다. 마태오는 이것을 연결시켜 한 단락으로 묶었다. 양과 늑대의 비유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빌려왔다(이사 11,6; 65,25). 양의 탈(양가죽)은 예언자들의 독특한 옷차림이 아니고 상징어다. 초대교회에서 그런 오해가 흔했는데 예언자들은 양, 염소, 낙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잘못된 가르침을 사나운 늑대로 표현하는 경우가 초대교회에서 흔했다(사도 20,20; 디다케 16,3). 공동성서에서도 예언자 곁에 늑대가 있던 구절도 보인다(에제 22,27).

나무를 연구하는 식물학자가 오늘 구절에서 의아하게 생각할 부분이 있을지 혹시 모르겠다. 좋은 나무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던가. 예수는 식물학자가 아니므로 비유의 학문적 정확성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겠다. 전하려는 메시지를 돋보이기 위해 사용하는 비유의 부적절한 부분을 우리도 가끔 무심코 지나치기도 한다.

▲ ‘최후의 심판’(세부), 미켈란젤로, 1534~1541년 작품

거짓 예언자를 알아내는 기준을 마태오는 제시한다. “열매”는 행위의 결과 또는 행위 자체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마태 3,8; 야고 3,17). 이스라엘에서 흔히 보이는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오늘 비유에 포함되었다.

나무와 열매 비유를 마태오는 윤리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세례자 요한의 말(마태 3,10)을 인용하여 심판 예고에서 예수와 세례자 요한이 같은 입장임을 마태오는 밝힌다. “주님”이란 단어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부를 때 사용한 단어다. 세상을 심판하는 사람의 아들을 의식할 때 쓴 단어다. 누구나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마태오는 이 단어로써 마태오 공동체에 하고 싶었다. 오늘 단락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1세기 후반과 2세기에 예언자들의 이중성 문제가 교회 내에서 크게 나타난 것 같다. 마태오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단락은 마태오 공동체가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를 보여준다. 방랑 설교자들이 마태오 공동체를 방문한 것 같다. 마태오 공동체는 예언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마태 5,12; 23,34). 거짓 예언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마태오 공동체는 이미 알고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였는지 지금 우리가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젤로데파, 바리사이파, 에세느파, 엄격한 유다인-그리스도인, 바울 추종자 등 여러 제안이 나왔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덕률 폐지론자들을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주목하고 있다.

마태오 공동체와 가깝게 연결된 초대교회 문헌 디다케(Didache)의 몇 구절을 보자. “자기가 가르치는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다”(디다케 11,10). “돈을 밝히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다”(디다케 11,5). 공동체나 신도의 집을 방문하여 돈을 요구하거나 받아가는 방랑 예언자들이 있던 모양이다.

오늘의 단락은 특히 종교인들에게 움찔한 말씀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예수는 “나는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니 말이다. 그러면 대체 우리 중 누가 예수 앞에서 자신 있게 설 수 있을까. “모두 나가시오(Extra omnes)”라는 말을 우리도 하느님께 듣게 되지는 않을까. 신학적 겸손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예언자들―그리스도인―의 진실을 판정하는 최종 기준은 말씀이 아니라 실천이다. 해석 역사에서 마태오 복음서 7,21과 코린토전서 12,3의 관계가 자주 연구되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나 바울의 기준은 아마도 코린토전서 13장 사랑에 대한 부분인 것 같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그런데 사랑보다 믿음을 더 강조해온 흐름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고, 한국 개신교는 대부분 그 흐름에 속하는 것 같다. 바울도 안타깝게 여길 일이다.

싫어하는 상대에게 어떤 단어를 뒤집어씌워서 가볍게 모욕하는 습관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빨갱이’ 같은 단어가 그중 하나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이단’이란 단어도 그와 비슷한 경우다. 예수나 마태오는 그런 단어를 쓴 적 없다. 나쁜 의도에서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는 버릇은 얼른 고쳐야 한다. 그리스도교 내부에도 그런 단어가 적지 않다.

“나는 하느님이 필요 없다”라고 외치며 의기양양한 사람들은, 하느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할 때 얼마나 외로울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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