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14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길을 찾는 사람은 적습니다.” (마태 7,13-14)

▲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 한스 멤링의 작품(1478년)
보기보다 해석하기 쉽지 않은 단락이다. 문과 길이라는 비유가 서로 연결 없이 나란히 있는 것 같다. 13절의 결론은 문과 연결되어 있지만 14절의 결론은 뚜렷하지 않다. 문과 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지도 않다. 특정한 길로 향하는 출입문을 뜻하는가?―문 다음에 길이 나오는 비유 순서가 그렇게 암시하는 듯하다. 길의 끝에 문이 나타나는가?―의미상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문과 길은 동의어일까?―그렇게 해석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두 개의 문이라는 비유는 유다교 문헌에 비교적 드물다. 두 길이 마주하는 비유는 그리스 문화와 유다교에서 널리 퍼져 있다. 의로운 자가 걷는 길과 불의한 자가 걷는 길이라는 비유는 특히 시편과 잠언에 흔하다. 윤리적 의미에서 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서에 보인다(마태 21,32; 22,16). 완전함에 이르는 길, 즉 공동체가 걷는 길이라는 비유는 마태오에게 중요하다. 마태오 공동체에 두 길이란 비유는 잘 알려져 있던 것 같다. 좁은 문이라는 비유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기 어렵다.

풀레(Pule)라는 그리스어는 도시 출입문이나 성전 출입문을 가리킨다. 큰 중앙문과 작은 옆문들이 있는 고대의 도시 문을 가리키진 않는다. 문의 비유는 천국의 문(이사 26,2; 묵시 22,14), 의로운 사람들이 성전 문으로 들어감(시편 24,7-10; 118,19-20) 이라는 연상을 낳았다.

낙원과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표현된 유다 문헌은 많다. 좁은 문이라는 비유는 당시에도 보기 드물었다. 죽음의 문과 생명의 문이 나란히 놓여있는 공동성서(구약성서) 비유를 마태오는 기억한 것 같다(신명 30,19; 예레 21,8). 서로 다른 두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는 비유다.

그리스어로 보면―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좁은 문’이라기보다 ‘비좁은 문’이라는 번역이 더 적절하다. 넓이가 단순히 좁은 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몰려 혼잡한 길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적게 모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에 비좁아진, 그래서 들어가기 더 힘든 그런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한적한 문으로 산보하며 들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관중이 많이 몰린 야구장 출입문을 상상하자. 설교자들이 흔히 오해하여 실수하는 대목이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믿음 때문에 겪는 고통을 가리키는 비유다. 특별한 은둔자적 삶을 마태오가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식한 것이다. 문을 열고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 끝에 있는 문을 마태오는 생각하는 것 같다. 의미상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길의 비유로써 문의 비유를 마태오는 보충한 것이다.

비좁은 길은 복된 선언이 향하는 의로운 사람들의 길이다. 이 길에 대한 비유를 마태오는 곧바로 이어지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단락과 연결시킨다. 넓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 예수의 제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경고 말씀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은 구원이 이미 보장된 편안한 길이 아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 사이에서 매일 고뇌하고 갈등하는 선택의 삶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입니다”(마태 20,16).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습니다”(마태 22,14). 세례가 구원을 보장하진 않는다. 세례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는 뜻이지 구원의 문으로 이미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세례로써 이미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흔히 거짓말한다.

이미 구원받았노라 설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 아래 누구도 구원을 이미 보장받은 사람은 없다. 숨 쉬는 사람 누구나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교황도 목사도 신부도 우리도 모두 하느님께 심판받을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심판에서 유일하게 특혜 받을 사람이 따로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가 궁금한가. 하느님께 물어보시라. 하느님의 심판에서야 누가 생명의 길을 걸었는지 비로소 판가름된다(마태 13,36-43; 22,11-14).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금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아직 구원이라는 문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문은 저 멀리 길 끝에 있다. 그 길에서 우리는 함께 걷는 신앙의 동지다. 우리는 외롭지 않다.

‘낮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은 오늘의 단락이다. 몸을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는 유다 속담이 있다. 윤리적 겸손보다 신학적 겸손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가 더 소중하다. 태도는 겸손하지만 정신은 오만한 사람들도 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려면 가난한 사람 앞에서 겸손함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하느님 앞에 겸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특징을 말해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돈에 대한 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그 진실 여부가 결판난다고. 그에 비하면 종교 계율을 지키는 것은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결국 적을 것이라는 결론을 오늘의 단락에서 이끌어낼 수 없다. 그런 뜻으로 행해지는 설교가 드물지 않다. 오늘의 단락에서 문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더구나 비유에서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하느님 찾아 걷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는 가르침이 오늘 단락의 주제다. 가난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그 길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경제적인 관점으로 보지 말고 신학적으로 보시라.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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