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미사 주례를 부탁받은 본당에 주일 아침 6시 미사가 있어서 가려고 택시를 잡아 탄 적이 있습니다. 아직 전철이 다니지도 않고, 바로 가는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라 종종 그런 식의 호사를 부립니다. 택시 기사님께서 주일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 떨고 있는 청년…… 인지 중년인지 모를 아리송한 젊은이에게 물음을 던졌습니다.

“아직 결혼 안 했죠?”
(속으로) ‘아니, 어찌 아셨지?’
(밖으로) “네, 아직…….”
“그럼, 이젠 서둘러야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늦게 결혼한단 말씀이야.”
“ㅋㅋㅋ 기사님, 저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독신에 대한 약속을 지키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랬더니, 기사님의 매우 실제적인 질문.

“안 힘들어요?”

저는 아직 잠결에 문맥 파악을 못한 채, “혼자 살고 생활비 나오니 힘들 건 없습니다” 했더니, 기사님은 “아니, 그거 말고……. 사람이 생리적으로 해결해야 될 게 있잖아요. 그걸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하! 그거요! 그게 가능하더라니까요. 허허.”

어느 날 새벽에 만난 택시 기사님 덕에 오늘의 속풀이는 아주 근본적인 궁금증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독신에 관한 기사님의 접근은 아주 원초적인 점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젊은이(특히 남성들)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 관점 때문에 수도성소, 사제성소 앞에서 주춤하고 엄청 망설이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저 역시 한때는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성(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특징적 능력으로서)을 동원하여 사고해 본다면, 육체적 관계를 통한 성욕구의 해소가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해도, 인간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과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관점은 자칫 결혼을 성욕구의 해소에만 국한해서 보는 매우 편협한 태도에 머무르게 합니다. 일생을 함께한다는 결혼은 단지 그것만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걸 결혼하신 분들은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러니 충실히 결혼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외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물적 차원에서 욕구대로 행동한다면, 과연 건강한 가정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결혼의 유대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배우자에게 충실하려 노력하는 분들은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성숙함을 이뤄나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이 태도는 이성적 판단과 의지의 발현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독신서원이나 정결서원을 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과는 생활양식이 명확히 다르지만, 약속에 대해 충실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독신을 서약한 이들은, 특정한 인간관계에 매이기보다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구현해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제 독신은 역사적으로 12세기에 들어와서야 교회법적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제도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수도자들은 공동체를 통해 함께 살기에 ‘독신’이라는 말의 뜻처럼 홀로 산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수도자들의 독신은 단순히 홀로 산다는 의미보다는 ‘정결’ 서원을 통해 성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추구합니다.

이 덕목(독신의 영적인 차원으로서)은 이미 언급했듯이 특정한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일치로 나아가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건강한 육체가 우리를 성적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쉽게 허락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수도생활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정결’의 생활양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 내에서 지속적으로 사제 독신제 폐지에 관한 다양한 찬반 여론이 제기되어 온 것을 잘 압니다. 사제가 독신과 결혼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매우 합리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설령 사제 독신을 선택으로 해도 좋다고 교회법이 수정된다 해도 수도자들의 ‘정결’ 서원은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법적 차원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뭘 좀 제대로 알고 사제성소를 선택할 걸, 하는 저 같은 수도성직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결서원을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란 걸 수도자들의 삶이 증거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적인 욕구의 해소는 인간적 성숙의 필수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접하는 매체들의 대부분이 노골적이든 잘 포장된 것이든 ‘사랑’의 이름을 담은 섹스를 주요 주제로 삼고 있기에, 이에 깊이 영향을 받은 우리들 역시 성욕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 하는 회의를 하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은 그런 고민을 무색하게 합니다. 그분의 삶은, 우리가 길들여진 것과는 다른 양태의 사랑을 실천하여, 인간의 성숙과 성숙한 인간의 사랑이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온갖 매체는 자연에 충실하라고 유혹하지만, 우리는 동물들처럼 욕구에만 충실한 사랑을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더욱 더 인간다워져야 하고, 나날이 성장해야 할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택시 기사님 덕에 우리가 왜 자연을 거스르고 살아가는지 답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종종 우리의 본성이 정결 생활을 힘들게 해도, 우리에게 서약을 지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서약을 우습게 아는 성직자를 신자들이 신뢰하지 않을 것이니, 실제로 더더욱 서약을 지켜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미 결혼하신 분들은 어떤 서약을 살아가고 계시는지요? 상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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