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7일 첫 음반 발매 기념 콘서트 여는 꽃다지 가수 조성일 씨

수년 째, 그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무대에 서는 게 두려웠다. 그가 몸담았던 팀이 오랜 시간 준비한 새 음반을 녹음하던 때에는 목이 망가져 병원에 다녀야 했다. 불면증은 극에 달했고, 몸은 여기저기에서 이상 신호를 보냈다. 에너지는 바닥났고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꽃다지의 가수 조성일 씨. 그는 작년 4월 서울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향했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주도를 택한 건, 오키나와의 기억 때문이었다.

“꽃다지가 오키나와 평화행진에 초대 받은 적이 있거든요. 직접 마을길을 걸었는데,  참 인상적이었어요. 자기들끼리 좌판을 깔고 무언가를 팔고 노래도 불렀어요. 무엇보다 마을 전체가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었죠. 거기서 살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 뒤에 제주도에 가족여행을 왔는데 그 때 오키나와에서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죠.”

▲ "결국, 나와 화해하고 내 안의 에너지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꽃다지 출신 가수 조성일 씨 ⓒ문양효숙 기자

영혼과 삶의 황폐함 끝에서, 15년 간의 꽃다지 활동을 접고 제주도로

십여 년 전, 무대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그는 안치환보다는 부드럽고, 김원중보다는 섬세한 어딘가의 목소리를 지닌 새내기 가수였다. 초창기 꽃다지 가수들이 강력한 무대장악력과 힘 있는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에너지를 전하고 현장을 뜨겁게 달구는 ‘선동가’ 스타일이었다면, 그는 서정적이면서도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고유한  분위기로 무대를 채우는, ‘조금 다른 느낌’의 멤버였다.

1998년부터 2012년까지 햇수로 15년의 활동. 그는 꽃다지 최장수 가수가 됐다. 긴 시간 함께 울고 웃었던 팀을 떠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결정을 내렸을 당시는 10년 만에 낸 4집 앨범이 평론가와 대중에게 좋은 평을 얻은 때였다. 활동을 펴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오래 있었기에 떠날 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내 안에 에너지가 없어서 ‘함께 싸우자’고 할 수도 없었고, 위로해 줄 수도 없었어요. 에너지가 있어야 사람들이랑 교감할 수 있는데 그게 없으니 무대에서 거짓말을 해야 했죠. 그 상태로 올라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음악적으로 재충전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어요. 노래를 부르기는 해도, 평상시엔 완전히 지쳐 있으니까,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요.”

그렇게, 뒤돌아보지 않고 제주도를 향했다. 지금 사는 서귀포시 하원동의 집도 보자마자 바로 계약했다. 집을 구한 후에야 하원동이 강정마을과 차로 5분 거리라는 라는 걸 알았다. 이사 온 뒤 얼마 되지 않아 강정포구에서 열린 평화활동가 대회에 멀찍이 서 있다가 주변 사람에게 정체가 발각돼(?) 다음날 제주에서의 첫 공연을 하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고, 강정과 연대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했다.

제주의 자연이 준 치유의 기운, "결국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 조성일 씨의 첫번째 앨범 <시동을 걸었어>
제주도에서 생활한 지 1년 6개월.  그가 새 앨범을 세상에 내놓는다. 아침저녁으로 어린이집 차량 운전을 하고, 어린이집 근처에 작은 작업실을 구해 노래를 만들었다.  주말마다 서울에 와서 음반 녹음을 했고 텀블럭 소셜 펀딩으로 제작비를 모금했다. 모금액은 목표액을 뛰어 넘었다. 목 상태가 완전히 나아진 건 아니지만, 제주의 자연이 자신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느낀다 했다. 결국,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첫 앨범인데, 만족스러우세요?”
“네. 솔직한 음반 같아요. 지금의 내 모습, 내 고민을 그대로 담았어요. 미화시키지도, 부풀리지도 않고요”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를 꼽는다면 어떤 곡일까요?”
“음, 어렵네요. 쉽게 나온 곡이 없거든요. 한 곡 한 곡 힘든 상황에서 나와서인지 모두 애착이 생겨요. 다만 음반에서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 곡이 뭐냐고 한다면 ‘나에게로 가는 길’이란 곡이예요.”

누군가 내게 말했지 사는 게 너무 느린 것 같다.
무수한 것들을 놓치며 답답하게 살아간다고

나또한 그런 날 보며 끊임없이 자학을 했지
변할 줄 모르는 내 자신에 잔인하게 욕을 해댔지

무기력하게 시들어 가는 절망 속에 지쳐만 가는 안쓰러운 나를 보았지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너무 멀리 찾아 헤멨나
다른 곳만을 바라 보았나
내속에 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난 믿을 수가 없었나

-조성일 1집 앨범 <나에게로 가는 길>

결국, 내가 나를 토닥여줘야,  "괜찮다고, 내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나 자신과 싸우고 결국 화해하는 노래예요. 자학이 심했거든요. 실수를 하거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견딜 수가 없었죠. 어느 순간 거울 앞에서 내 모습을 봤어요. 결국 내가 나를 토닥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느리건, 답답하건 나는 그냥 나를 믿고 나만의 흐름대로 가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하면서요. 그런 고민을 음반에 담았어요.”

그는 자신을 향한 이 위로가 결국 세상을 위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민중가요가, 길거리에 내몰리고 상처 입은 이들에게 ‘힘내서 나가 싸우자’고 말하기 전에 ‘많이 아프니? 힘들겠다’하며 공감해 주길 바란다. 사람들의 일상을 어루만지기를 바란다.

자신과 세상을 향해 ‘괜찮다’고 노래하는 그에게 계속 민중가수로 불리고 싶은지, 그렇게 불러도 될지 물었다. 그는 “언젠가 감사하게도 그렇게 평가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굳이 따지자면 저항가수 정도가 적당할 듯 하다”고 답한다. 민중가수는 그에게 가볍게 불리울 수 없는, 소중하고 묵직한 호칭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공연장에서 ‘민중가수 누가 오셨습니다’ 이렇게 소개하잖아요.  저는 '민중가수'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꽃다지를 민중가수, 혹은 민중노래패라고 하는 건 맞아요. 역사 속에서, 현장 속에서 그런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 왔으니까요. 민중가수는 앞으로 저의 지향점이죠.”

첫 번째 솔로 앨범,  나의 맨 얼굴로 세상을 위로할 수 있다면

활동한지 20년이 넘는 꽃다지에게 붙는 수식어는 ‘희망의 노래’다. 그들은 자본이 모든 빛나는 가치를 삼켜버린 시대에, 꿋꿋하게 소중한 가치를 노래해 왔다. 자신들이 담아내야 할 메세지와 음악의 완성도에 대한 긴 고민의 시간 끝에 세상에 내 놓은 노래들은 이전보다 훨씬 삶의 맨 얼굴에 가까웠다. 자기 이야기를 하듯 써 내려간 노래들에는 녹록치 않은 세상을, 그 속에서의 좌절과 분노, 서글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담아냈다. 세상을 직시하면서 부른 희망은 이전보다 작은 소리일진 몰라도 훨씬 살가워졌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희망의 노래 꽃다지'다.

그 긴 고민의 시간을 함께 했던 조성일 씨는 이제 홀로 서기를 시작한다. 진짜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했다. 결국 날 것의 자기 얼굴이라야 진짜 힘이 될 수 있고, 진짜 힘만이 세상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음반발매일인 8월 17일. 홍대 롤링홀에서 그의 첫 번째 단독 콘서트가 열린다. 두려워하고 자책하는 시간의 끝에서 자신을 위로하며 만든 그의 노래가, 자기만의 길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는 그의 맨얼굴이, 당신의 어깨를 토닥여 줄 듯 하다.

씩씩하지 않아도 괜찮아. 힘들고 고단하다고 말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