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39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눈이 맑으면 여러분의 온몸이 밝고 여러분의 눈이 흐리면 여러분의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게 되거나 한 편을 존경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산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오 6,22-24)

눈에 관한 처음 두 구절은 해석하기 쉽지 않다. 눈을 ‘몸의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문화에서 일반적이었다. 이 표현은 유다 사회에도 받아들여져 오늘 단락에서 사용되었다. 마태오는 눈을 비유(Gleichnis)보다 은유(Metaphor)로 사용한 것 같다. 즉, 신체의 일부로서 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유다교에서 눈은 성품, 도덕적 수준을 반영하는 은유적 단어였다. 신체 건강 상태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단어가 아닌 ‘맑은’(haplous) 눈과 ‘흐린’(poneros) 눈은 무엇을 가리킬까.

맑은 눈은 순수한 마음뿐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정직함과 존중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인간이 맑은 눈을 가졌느냐 여부를 다루는, 즉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구절은 아니다. 인간의 행동을 언급하는 구절이다. Adam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내적 빛'(lumen internum)으로서 이성(理性)이 여전히 인간에게 주어졌는지 여부를 오늘 구절에서 의심한 칼빈(Calvin)은 적절하지 않은 고뇌를 한 셈이다. ‘나쁜 눈’(마태오 20,15; 신명기 15,9)은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흐린 눈은 재산에 대한 질투 가득한 욕망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한상봉 기자

눈에 대한 은유는 재산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 연결된다. 재산에 대한 태도에서 인간 존재의 품위가 결정된다. 빛과 어둠이 결정되고 인간의 완전함 여부가 결정된다. 불의하게 번 돈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소유 자체가 문제되고 있다. 인간이 재산을 섬기는가 아니면 재산이 인간을 섬기느냐 여부다. 인간이 재산으로 인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는 어둠에 빠진다.

몸과 사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두 영역에서 은유와 경험을 기초로 재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마태오는 다루고 있다.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제목을 정할 수 있는 마태오 6,19-7,11에서 재산에 대한 주제가 포함된 까닭은 무엇일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보다 더 완전하게 되려면 재산 문제에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태오는 경고하는 것이다. 세상의 부자들보다 우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라는 뜻이다.

흔히 그리스도교에서 완전함은 완덕(完德) 운운 하며 주로 개인윤리적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렇게 해설하는 설교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돈에 대한 태도에서 인간의 완전함 여부가 결판난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 다름 아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재산과 하느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예수는 경고한다. 세상의 부자들에게 삿대질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교는 재산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현실을 반성하라는 뜻이다.

‘재산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구절은 부자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성서구절일 것이다. 사실 교회에게도 내심 곤혹스런 구절이다. 돈과 관계없는 권력은 세상에 없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권력은 짧고 돈은 길다. 돈이 하느님처럼 위력 있고 매혹적이라는 사실을 자영업자 출신 예수도 모르지 않는다. 예수도 돈맛을 알았기에 이런 경고를 하는 것이다.

돈을 숭배하는 문화에서 돈은 하느님과 같은 지위로 올라간다. 돈에 대한 정신적 자유로움을 칭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런 자유로움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돈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의미까지 진전되어야 한다. 가난이나 자선에 머물지 않고 가난의 구조적 사회적 문제까지 두루 생각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 마더 데레사의 모범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이다. 돈 문제에 대해서 해방신학의 소리를 경청할 만하다.

사족-오늘 많은 설교가 힘이 없고 설득력이 적은 까닭은 무엇일까. 설교에는 대략 이런 흐름이 있다. 1. 개인을 훈계한다. 2. 사회를 비판한다. 3. 교회를 반성한다. 대부분 설교자들은 1번만 다룬다. 1번에 이어 2번을 다루는 설교자는 적다. 세 가지를 함께 다루는 설교자는 드물다. 대부분 설교가 개인에 대한 윤리적 훈계로 흘러간다.

아름다운 설교는 많으나 올바른 설교가 드문 현실이다. 설교에서 감상문 쓰는 사람도 있고, 설교와 일기장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설교는 성서구절을 보고 느낀 설교자의 개인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가 아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는 시간이다.

신자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 설교라는 것을 설교자들은 정말 모를까. 설교자들은 성서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가. 재산에 대한 오늘 말씀은 교회가 세상의 부자들을 우선 비판하라는 것이 아니다. 돈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현실을 먼저 반성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 어디 많은가.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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