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SBS 수목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

신이 되고 싶은가? 대중의 자기 확장 욕구는 이제 여기까지 온 건가? 훤히 드러나는 것은 보지 않으면서, 남들이 못 보는 것은 보려 드는 초능력에 대한 욕망 말이다. 보이는 것을 알아보고 지배하는 정도로는 만족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혼자만 꿰뚫는 초능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

8월 1일 종영한 SBS 수목극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는 남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초능력자 박수하(이종석 분)가 등장한다.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속마음이 들리는 초능력자로 살아왔다. 그냥 어느 날부터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노력의 산물이 아니며 필연적인 이유 따위도 없다. “나 괴물 아니에요”가 이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박수하의 유일한 설명이다. 고3이었던 당사자에게는 조금 번잡스러운 ‘귀’가 하나 더 있을 뿐이지만, 이 초능력이 실상 이 드라마의 처음이자 끝이다. 그리고 박수하와 박수하를 둘러싼 관계들을 규정하는 모든 것이다.

 ▲사진출처/<너의 목소리가 들려> 홈페이지 갈무리

초능력 소년의 ‘정의로움’에 의존하는 법정

초능력자인 소년은 어려서 고아가 되고 아홉 살에 아버지의 살해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참극을 겪었고, 자기도 죽다 살아난다. 지나가던 ‘목격자’인 한 고3 누나 장혜성 덕택으로 살아나긴 하지만, 향후 11년간을 이 살인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에 연루된 채 살게 된다.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고, 본인도 여러 차례 죽을 뻔 한다. 끔찍한 예고 살해 위협 속에서 자신과 그녀를 ‘지켜야’ 했다. 눈이 뒤집혔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 할 수 없는 (오직 살인에만 집착하는) 희대의 ‘살인귀’ 민준국(정웅인 분)으로부터.

대신 초능력자에게 일상은 아주 쉬운 일이다. 돈 걱정, 성적 걱정, 실연 걱정은 남의 일이다. 아버지는 엄청난 보험금을 유산으로 남겼고, 공부는 취미로 해도 성적은 최상위권이고, 운동으로 다져진 기초 체력 외에도 ‘남의 마음’이 들리는 통에 몸싸움 할 때 공격과 방어가 너무 쉽다. 아홉 살 때부터 줄기차게 만나고자 했던 그녀, 장혜성을 찾는 일만이 유일한 어려움이다. 그녀의 안전을 지키는 건 조금 힘들긴 하다. 10여년을 준비했지만 때로는 역부족일 때도 있다.

하지만 현재 국선변호사가 된 장혜성(이보영 분)이 승소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나, 열 살이나 연상인 혜성의 사랑을 얻는 일 등등은 쉽다. “상대방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들려”오는 초능력 덕택이다. 대한민국 법정은, 아니 적어도 극중 연주시의 법원은 이 초능력 소년의 정의감과 양심에 의해 모든 재판이 좌지우지 된다. 검사, 판사, 변호사가 제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봐야 이 소년이 들려주는 ‘진실’ 한 마디를 못 따라간다.

장혜성은 점차 박수하 없이는 변론 한 줄 준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의존적이 된다. 마치 사건의 총체적 진실은 사람이 속으로 하는 말에 달려 있고, 그걸 듣는 자가 세상에서 제일 우월하다는 투의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곳이 법정인 듯하다. 법정과 법조인들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실상 요괴와 전사들의 장풍대결이 요란한 판타지물로 보인다.

초능력 없이는, 사랑 불가?

한때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드라마 속에 유행하기도 했다, 오히려 호황기에는 그런 스토리가 많았다. 이제 주인공 캐릭터는 매력은 물론 초능력까지 갖춰야 하는 듯하다. 약간 뛰어난 정도로는 안 되고, 남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든가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깜짝 놀랄만한 초능력이어야 한다. 사랑에는 나이도 이유도 중요하지 않지만, 초능력은 중요하다. 그런 초자연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나만 바라보는 내 편이라는 환상이 여성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요즘 드라마로선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 되레 씁쓸하다.

현실이 팍팍하니까 초능력에 의지해 대리만족하겠다는 것일까. 불황 탓도 있겠고, 시청자들이 현실의 고달픔에 워낙 위축돼 있는 건 아닌지, 사랑마저도 초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우울한 속마음을 엿보는 기분이다. 19세였다가 20세가 된 ‘입시생’과 29세였다가 서른이 된 여성변호사의 키스 장면은 어여쁘기 그지없었지만 ‘초자연’의 연속선상에 있었달까.

보이는 것을 더 잘 보고 자세히 분석하려는 태도는 이제 바보짓인가? 대중은 이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초능력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올 상반기 미니시리즈 중 유독 이 작품만 시청률이 높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절망, 그리고 초능력을 통해서만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술봉의 등장이다.

모든 게 ‘들리는’ 사회가 되면 가장 먼저 제거되는 건 아마 약자일 것이다. 약자들만 그걸 모른다. 속으로 욕조차 할 수 없고, 반체제적인 생각 한 줄 떠올릴 수 없게 된다는 걸 생각 못한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서’ 들어주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하는 달콤한 ‘로맨스’만 상상하라고 드라마는 요구한다.

다만,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일 뿐

초능력 소년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가? 한 번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에도 설마 그럴 수 있을까?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욕망은 이렇게 유아적 환상에 가깝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대중 연속극이 써서는 안 될 극약을 풀었다. 단 한 번뿐인 극약처방이다. 비슷한 드라마는 안 나오길 바란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법체계가 수하와 혜성을 위해서 아니 그들의 사랑을 위해서만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상황은 참으로 우려스럽다. ‘착한 주인공’을 위해서라면 과정과 논리가 엉켜도 상관없다는 식의 전개, 결국은 후반부로 갈수록 감성에만 호소하는 대사들의 난무로 논리는 실종됐다. 장혜성은 차라리 국선 이전의 ‘20초 변론’ 시절에 더 법조인다웠다. 기준이 사라진 채 인맥으로 얽힌 법정은 감상주의의 늪에 빠졌고, 잔뜩 극대화된 살인사건은 유야무야 SF가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조차 ‘소재’에 머물고 말았다.

이런 결론은 법정에서 연애하는 내용의 기존 ‘법정 드라마’와는 좀 달랐지만, 훨씬 더 위험하다. 기상천외한 살인자 한 명의 악행이 전체의 불행을 초래하며, 알고 보니 그 살인자에게도 살인의 이유는 있었다는 “그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변론이 진정 이 드라마의 메시지인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기존에 있는 법의 정신부터 준수하라. 우리는 그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 초능력에 의지한 드라마에 합리적 ‘어른’은 없었다. 고교생의 초능력만이 세상을 구한다는 해피엔딩이 그래도 좋은가?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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