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김대현]

오랜만에 서울에 해가 들어 천으로 된 컨버스를 신고 나왔다. 마른 길을 걷는데 왠지 길바닥이 가깝게 밟혔다. 신발 밑창을 보니 손가락 하나가 드나들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래 신어온 신발이구나 싶다.

ⓒ김대현

나는 황학동 시절 풍물시장을 보지 못했다. 청계천 공사로 동대문운동장에 쓸어 담기듯 진쳐있던 좌판들이 내가 기억하는 풍물시장의 첫인상이다. 온갖 괴랄한 성인용품이며 민간요법 약재며 반편이 골동품과 옷가지를 구경하러 몇 번을 들렀고, 몇 년 후 동대문운동장마저 서울시에 쓸어 담기듯 부서진 후에 동묘앞서 뚝 떨어진 현재의 장소에 풍물시장이 유배되고 나서는 딱 한 번을 둘러보았다. 의리 차원에서 십 몇 분을 걸어 도착한 동묘앞 풍물시장은 이런 입지에서 무슨 장사를 하느냐는 공기와 그래도 장사는 벌려야지 않겠냐는 강단이 상인 분들 저마다의 표정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이제는 다 닳아 신발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진 내 컨버스화는 그곳에서 산 것이다.

풍물시장엔 운동화집이 있었다. 물건의 출처는 구제 물건이 늘 그렇듯 알 수 없으되 어느 아울렛에서 박스떼기로 처분된 폐품들과 남이 신다 버린 신발 중 다듬어 팔 만한 것들을 진열해 놓았다. 대개는 새 물건 입성을 내려 흰 페인트칠을 한 놈이 대부분이되 그 중 한 신발이 내 눈에 들어왔다. 리바이스에서도 컨버스화가 나오나? 잭 퍼셀 컨버스와 똑같이 생겼으면서 리바이스 자수를 옆구리에 찬 그 신발을 내 발에 꿰어보니 웬걸 꼭 맞았다. 그런 가게에서는 당연히 한 디자인에 한 사이즈밖에 없기에 마음에 드는 신발이 발에 꼭 맞을 때는 참 기분이 좋다. 그렇게 3만원을 주고 나는 메이드 인 베트남 리바이스 컨버스를 사왔다.

풍물시장에서도 그런 브랜드 딱지가 붙은 물건들은 딴 것보다 비싸게 팔렸다. 4천 원짜리 캘빈클라인 팬티라든지, 3만 원짜리 캉골 모자라든지 하는. 그리고 그렇게 사온 리바이스 컨버스는 신은 지 3개월째에 양쪽 뒤축 안감이 내려앉고, 4개월째에 한쪽 뒤축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컨버스화야 본래 모양으로 신는 거지 그리 튼튼한 신발은 아니니까. 그리고 싸게 산 것들은 대개 그만한 값을 치르기 마련인 것이다. 구멍이 났어도 어차피 맑은 여름날에나 신을 신발이었으므로 그 후로도 이따금씩 계속 신고 다녔다. 그렇게 싸게 산 물건들은 흠이 생겨도 좀체 버려지질 않는다. 이사 네 번을 다니는 5년 동안 꼬박꼬박 그 신발을 싸들고 다녔으니까.

ⓒ김대현

구멍이 나 아스팔트 질감이 밟히는 신발을 보고 무려 수선을 해볼까 하는 염이 들어 수선집을 찾아갔더니 양쪽 다 해서 2만원을 달란다. 추억은 소중하지만 또 그것을 너무 대접해서도 안 된다. 단념하고 이번엔 진짜 컨버스 매장을 갔다. 내 신은 것과 똑같은 모양의 신발이 진열대에 있었다. 예쁘게 가위질된 가격표엔 69,000원이 도장 찍혀 있다. 몇 초를 망설이다가 밑창 뚫린 신발을 신고 싼 걸 보러 동대문을 거닐 자신이 없어 그냥 카드를 건넸다. 흰색 컨버스는 그 한 치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옛 신발을 벗고 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정품인 그 새하얀 신발을 신어보았다. 그 순간 헌 신발을 신었을 때 양옆에 농담처럼 붙어있던 어떤 푸르고 투명한 날개가 팡 하고 깨지는 기분이었다. 매일 구제 명품 옷을 사 입다가 ‘정말로’ 명품을 지른 뒤에 불안불안하고 어딘가 어색해하던 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력을 모르는 물건들은 꼭 어디가 끝인지 모를 사람 속을 대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력을 모르는 물건을 팔던 사람들 또한 대개는 그 내력이 궁금한 사람들이었다. 풍물시장에서 주운 내 낡은 리바이스 컨버스의 내력을 내가 모르듯, 그곳 상인들이 무슨 곡절을 거쳐 그곳으로 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네들도 나처럼 번연한 정품이 어딘가 모르게 쑵쑵하고 어색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헌 것을 고쳐 신으며 무엇인지도 모를 브랜드에 내가 속기도 하고, 그래도 택이 붙은 염가품을 신고 깨끔한 브랜드를 못내 놀려먹기도 하는. 그러니 그 물건을 팔던 상인의 멱살을 잡고 이 물건이 정품인지 아닌지 당장 실토하라 했어도 그는 절대로 대답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간 내 곁을 사붓이 지킨 그 리바이스 컨버스 또한 끝내 제 속을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리바이스 자수 밑으로 가지런히 터진 뒤축처럼, 빌딩으로 우뚝 솟은 지엄한 가격표에 그네들은 그렇게 옆구리 터진 채로 세상을 깔깔대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따금 궁금하기는 하다. 과연 내가 신던 그 컨버스는 정말로 리바이스에서 나온 모델이었을까, 아니면 어느 베트남 업자들이 제 맘대로 찍어낸 가품이었을까? 가끔은 인생에 비밀이 있어 즐거울 때도 있는 것이다.
 

 
 

김대현 (베드로)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있으며, 노래하고 사진찍고 잡지 표지디자인 만지는 일을 좋아한다. 각 세대의 상식을 다른 세대에 번역해주고 이해의 끈을 잇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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