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마산 수정만 STX 조선소 유치 반대운동에 나선 장요세파 수녀


       마산시 구산면에 위치한 엄률시토회 성모의 트라피스트 수녀들이 지난 2007년 11월 14일에 서울 정부중앙청사 정문 앞에 수도복을 입은 채 긴 현수막 뒤로 줄지어 서 있었다. 수녀원 앞바다인 수정만에 들어설 예정으로 있던 STX조선소 유치를 막기 위한 것이다. 마산시는 1990년에 저소득 무주택 주민의 주택공급을 위한 주택단지 조성을 목적으로 수녀원이 위치한 마산시 구산면 수정리 앞바다를 매립할 수 있는 면허를 경상남도로부터 받고 두산에 매립용역을 주었으나 2006년에는 STX중공업이 매립시공권을 양도받아 줄곧 수정만에 조선소를 유치하려고 하고 있다.

마산시가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매립목적변경을 경상남도에 다시 신청하였고, 수정리 주민들과 수녀원에서 매립목적변경 무효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였다. 그러나 수녀들은 2007년 이후 여지껏 수정리 주민들과 서울 오르내리며 집회를 하고 탄원서를 돌리고 있다. 최근에는 이 지역을 ‘지방산업단지’로 지정받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환경영향평가 결과에 항의하고 있다. 이미 나온 환경영향평가서 초안이 마산시와 STX에게만 유리하게 작성된 부실평가라는 것이다.

현재 380세대의 주민 가운데 120세대가 보상금을 거절하고 수정만의 원상복구와 조선소 유치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대부분 노령인 주민들은 텃밭에서 열무 서너단씩 묶어서 장에 내다팔고 하루 1천원으로 생계를 도우며 매일같이 예전처럼 홍합을 까고 있다. 보상금으로 주어진 천만원을 왜 안 받느냐?는 주변의 이야기에 그들은 “죽을 때 천 만원 내 가슴에 얹고 가냐?”고 말한다. 수정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장요세파 원장수녀를 인터뷰하여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았다.


한상봉: 관상 봉쇄 수도원에 계시는 수녀님들이 어떻게 거리로 나오게 되셨는지요.

장요세파 수녀: 우리가 거리로 나서자 마산교구의 김영식 신부님은 저희더러 ‘출출가’(出出家)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죠. 작년 11월 4일쯤 주민들이 저희 수녀원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수정만 용도변경에 대한 행정심판이 내려진다면서 다급한 표정이었습니다. 당시 <천국보다 긴 계단>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수녀원에서 찍고 있었는데, 주변의 도움을 얻어서 마창환경연합 등 시민단체들과 연결하여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된 것이지요.

처음엔 무슨 굉음이 바닷가에서 들리곤 했는데, 그러다 말겠지, 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자료조사를 하고 나니 사태가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로마에 계신 베르나르도 총장님한테 허락을 얻고나서 법제처 앞에서 첫 집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응해주지 않던 이들이 우리가 거리에 나서서 데모를 하니까 면담을 허락해 주는 것을 보고 왜 사람들이 집회를 하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그래도 수도원의 봉쇄적 성격상 거리로 나가는 데는 공동체 안에서도 이견이 많았을 텐데요.

우리는 봉쇄수도원이니 조용히 지역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러면 결국 주민들을 다 팽개치는 격이 되니 이런 주장이 오래가지 않더군요.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데모는 저희 신분에 맞지도 않고 교회 안에서도 “봉쇄수도자들이 데모라니..." 하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STX측에선 본부장이 찾아와 수도원만 따로 돈을 챙겨드릴 테니 조용히 나가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러나 주민들과 함께라면 모를까, 저희는 그럴 생각이 없노라고 단연 거절했습니다.

우리가 봉쇄를 지키는 것은 마땅하지만, 수도자들이 여기 시골구석까지 온 것은 예수님의 삶과 가치를 따라서 온 것이지 ‘봉쇄’라는 껍데기를 지키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정작 알맹이를 내버리는 짓은 바보나 하는 짓이죠.

이번에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장요세파 수녀
우리도 모든 것을 다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도 현대의 모든 약자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다만 다른 주민들과 다른 점은 우리는 그 상황을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왜 수도원은 망하면 안 되는가?” 하고 말이죠. 수도원도 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STX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주민들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수도원에 수도자로 더 이상 살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목숨과 그들의 목숨은 다르지 않습니다. 수도자들의 목숨이 그들보다 더 고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수녀원의 보상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문제로 데모를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적인 선택이죠. 다른 나라의 수많은 시토회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알제리에선 10여 년 전에 7명의 수녀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에게 목이 잘려 죽었죠. 그래도 두려움을 이겨내고 공동체를 계속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길이죠.

그런데 이 문제로 집회를 하고 그러면 수도생활을 지켜주던 생활리듬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리듬이 깨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활이란 고무줄 같은 것입니다. 다시 본래 상태로 돌아갈 힘이 없다면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지요. 집회에 나가서 리듬이 깨지더라도 다시 대화를 통해서 본래의 리듬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수녀들은 유리그릇 같아서 깨지기 쉽다고 교회어른들이 염려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만..

아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 그들의 양심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존의 모습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언제나 모험을 하려는 이들도 있었고, 현상유지를 하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를 욕하거나 뭐라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나치게 극단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한편이 자극을 줄 수는 있겠지요.

제 생각엔 교회 공동체 안에도 약자를 위한 공간이 없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보니 교회가 무척 힘이 센 집단이란 걸 알았습니다. 수정만 매립목적 변경이 결정된 뒤에 우리들과 주민들이 마산시장을 만나러 갔는데 공무원들이 겹겹으로 막아서서 들여보내 주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10여 명의 신부님들이 마산시장에게 공개질의서를 제출하려고 들어서자 마산시청 올라가는 계단이 홍해바다처럼 갈라지더군요.

토마스 머튼 같은 분도 트라피스트 수도원 사람인데, 그분이 말한 것처럼 이 일을 하시면서 관상과 실천이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헌신과 희생이 없는 관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자기도취입니다. 오랜 노력으로 아름다운 기술을 습득해서 자기성취를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교적 관상은 이타적인 삶과 상관이 있습니다. 사막의 교부였던 안토니오를 보더라도 이단이 무성해지자 문 걸어 놓고 살던 은둔생활을 접고 알렉산드리아로 나아가 주교를 도왔습니다.

우리도 이 문제가 주민들에게 다급한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라서 나서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럴 때 우리가 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우리가 해 온 관상이란 다 무엇입니까? 우리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성취를 위해서 수도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말하듯이 남루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그리스도에게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수도자들에게 잘 주어지지 않는 데 갑자기 그런 기회가 저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주신 기회입니다.

집회에 나가서 관공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텐데요.

이 일을 하면서 제 안에서 용암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예수가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신 이유를 알 것만 같더군요. 그렇게 내 안에서 용암이 끓는 것은 모두 내 안에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인데, 그런 것들을 다 끌어안고 가라고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요. 우리 내면에는 선도 악도 아닌 중간지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공간 때문에 선과 악이 섞이지 않는데, 이 캄캄하고 어두운 데서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고요하고 텅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거죠. 서로 밀치는 강한 힘이 이 중간세계 때문에 혼돈에 빠지지 않는 거죠. 이러한 무경계의 세계까지 우리는 내려가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이 갖는 긍정성에 대한 것인가요?

선과 악이라는 판단이 소용없는 무경계의 세계에서 보면, STX나 마산시의 처사가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이젠 멀미가 납니다. 그들을 안타깝게 보는 눈이 생기면서 인간성을 보는 폭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장요세파 수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봉쇄수도원에서 생활하다가 세상으로 나와서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역시 수도자들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만사를 수행으로 바꾸어내는 힘을 지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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