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의 바닥에서 문득]


화장실 앞에서 밥을 먹는다
네 식구가 열일곱 평 낡은 아파트에서
뒹구며 사는 일이 이렇다
내가 출근을 하려 나간 문으로
학교 끝난 딸아이가 들어오고
아내가 머리 감고 나온 화장실로
아들놈이 바지춤을 부여잡고 뛰어들어간다
들어오고 나가고 먹고 싸는 일
그치지 않는 이 단순한 형식이 결코 가볍지 않아진 건
화장실 앞에서 밥을 먹는
작은 집에 살고 나서부터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이나
태어나서 죽는 일도 이와 닮았다는 생각이다
간신히 세상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사는 동안
내 안에 쌓인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먹고 모두 싸버렸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가난인가
아무리 수세식이라지만
아이들이 가끔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는
화장실 앞에서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다

-황규관, 화장실 앞에서 밥을 먹다

 

누구에게나 밥은 목 메이는 것인가 보다. 아니 모두에게는 아니겠지 어느 누구인가에게는 귀찮은 일이기도 하겠지. 꼭 그것 때문에 살지 않아도 되는 이에겐 때마다 돌아오는 공복도 거추장스러운 일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 ‘밥’ 한 그릇 먹기가 뜨겁고 목메이는 이들이 많다. 이 밥을 벌기 위해, 최소한 화장실이 딸려 있는 조그마한 공간 하나를 얻기 위해 평생을 발에 땀이 나도록,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도록 비루하게 살아야 하는 인생들이 많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 수많은 그럴 듯한 말과 철학과 도덕에 대해 논해 보지만 기껏 화장실 앞에서 네 식구 둘러앉아 밥 한 그릇 편하게 먹는 일 앞에 서면 사는 일이 ‘들어오고 나가고 먹고 싸는 일’ 외에 가치로운 무엇도 아니어서 되려 숙연해지는 삶들.

황규관 시인도 그렇다. 그는 이제 아예 ‘비루함을 더 큰 비루함을 완성하는 것’ 외에 이 시대 소시민들에게 주어진 무엇이 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 화장실 앞에서 먹는 밥 한 그릇 앞에선 어떤 고매함도 어떤 존엄함도 수치이며 장식일 뿐이다. 평생을 일해도 ‘쌓인 게 아무것도’ 없는 무욕의 삷이 가끔은 고맙기도 하지만, 눈물겹다. 초라함을 ‘고마운 가난’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시인의 마음이 평범한 삶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고결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화나게도 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산다. 콩쥐가 계모에게서 받은 구멍난 뒤주처럼 아무리 노력을 쏟아 부어도 늘 생활은 비좁고 허전하기만 하다. 그래도 수세식이어서 깨끗하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만 뒤를 보아도 악취 투성이인 세상이면서도 겉으로는 그나마 오물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도 누군가가 힘든 밥을 먹고, 세금을 내고,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하다 문득 깨어나 어둔 밤하늘을 보고 있는 어떤 이들의 서늘한 눈들을 본다. 알 수 없는 것은 저 밤하늘의 별들의 이야기 뿐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여기의 일도 참 알다가도 모를 일 투성이다.



*황규관 / 1968년 전북 전주 생. 1993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이 있다.

송경동 / 시인. 시집으로 <꿀잠>이 있다.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