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 김근수]

이름과 실제의 대응은 언어철학만의 주제는 아니다. 이름이 실제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거나 실제를 왜곡하는 사례는 세상에 흔하다. 그런 경우가 교회 역사에서도 드물지 않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 정도가 아니라 권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부적절한 호칭을 좀 더 적절한 호칭으로 고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교황(敎皇)과 교종(敎宗)이라는 단어에 얽힌 어원적 분석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라틴어 단어를 한자나 우리말로 적절하게 옮기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교황을 가리키는 적절한 단어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논의의 핵심은 이름과 실제, 즉 명(名)과 실(實)의 관계다. 현재 가톨릭교회의 최고지도자에 내용적으로 걸맞은 호칭은 무엇일까.

‘정치인이자 종교인’이라는 교황의 이중성
예수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

이미 굳어진 교황이란 호칭을 교종으로 바꾸자는 제안은 최근의 시도가 아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재임기에 그 제안은 부정적인 교황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이미지 개선 차원의 소극적 · 방어적 문제였다. 지금 교황 프란치스코 시대처럼 자신감 있게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분위기와 같지 않았다. 교황 프란치스코 등장 이후 그 제안은 교회 내에서 정서적으로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명칭 변경 문제는 결국 교황들의 노선 문제와 직접 연결되는 문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그리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같은 노선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개인적 언행으로 교황 이미지가 크게 달라졌지만 교황 제도 자체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런 두 가지 현실을 둘 다 정확히 보아야 한다. 그런 기초적인 사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한다면 교황 또는 교종이라는 호칭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다.

▲ “개혁적인 교황에게는 ‘교종’이란 호칭을 쓰고 개혁에 주저하는 교황에게는 ‘교황’이란 호칭을 쓰는 것이 좋을까. 다음 교황이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와 반대 노선을 걷는다면 그는 다시 교황이라고 불려야 하는가.” (왼쪽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권력지향적인 단어인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에게 좀 더 어울린다. 그들은 세상의 변화와 개혁을 촉구했지만 가톨릭교회 내부의 개혁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의지를 충분히 활용하여 가톨릭교회를 이끈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세상 개혁뿐 아니라 교회 개혁을 강조하는 교황 프란치스코에게는 좀 더 종교적인 호칭인 교종이 호평을 받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역시 교회 운영에서는 교황이라는 호칭이 타당하다.

명칭 문제의 핵심은 권력 문제임이 이제 드러났다. 사실 가톨릭교회의 교황은 UN에 가입한 한 나라의 국가원수이자 동시에 가톨릭교회라는 종교단체의 대표자이다. 교황은 교회 밖으로는 정치인이요 교회 내에서는 종교인이다. 198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전두환을 방문했을 때, 교황은 종교인이 아니라 정치인 자격으로 전두환을 방문한 것이다. 교황은 전두환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하고 청와대를 찾은 것이다. 전두환은 교황 방문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받은 계기로 적극 활용하였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교황 방문을 선교에 크게 활용하였다. 누이 좋고 매부 좋았던 일이다. 가톨릭교회는 현실정치에 문외한이 아니라 현실정치를 활용하여 교회의 이익을 얻어내는 데 선수다.

정치인이자 종교인인 교황의 이중적 성격이 호칭 변경이라는 논의 자체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정치인이자 종교인인 교황의 이중성은 가톨릭교회가 유럽의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한 결과 중 하나다. 교황청이 국가로 인정받고 존재하고 있는 근거는 성서 정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정치인이자 종교인인 교황의 이중성에 대해 예수는 어떻게 생각할까. 예수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교황의 이중성이라는 불합리한 제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주목된다. 그 진행 과정을 일단 역사의 흐름에 맡겨두기로 하자.

교황 제도, 호칭보다 내용부터 바꿔야 한다

논의를 가톨릭교회 내부에만 제한해 보자. 교황이란 단어는 교황의 권한 범위와 권한 행사 방식에 어울리는 호칭이다. 종교적 가르침뿐 아니라 종교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에 부합하는 호칭이란 뜻이다. 교종이란 단어는 종교적 가르침이라는 역할을 강조하지만 종교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감추는 호칭이다. 교황이란 단어는 가르침보다는 종교권력 행사 방식을 상대적으로 좀 더 강조하는 호칭이다. 교황에 대한 세상의 거부감을 줄이는 데는 교황보다는 교종이란 단어가 좀 더 선호되겠다.

비판받는 정당이 이미지 개선을 위해 정당의 이름만 바꾸어 신장개업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변신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없겠다. 교황 제도에 전혀 변화가 없는 현실에서 호칭을 바꾸는 문제는 그런 정당의 노력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교종으로 호칭을 바꾸는 것은 명(名)은 바꾸되 실(實)은 유지하는 작전이다. 교황은 명과 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호칭이다.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는 교종이, 정직한 표현으로서는 교황이 낫다. 무엇이 제1 기준일까. 이미지 개선인가, 아니면 정직함인가.

개혁적인 교황에게는 ‘교종’이란 호칭을 쓰고 개혁에 주저하는 교황에게는 ‘교황’이란 호칭을 쓰는 것이 좋을까. 다음 교황이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와 반대 노선을 걷는다면 그는 다시 교황이라고 불려야 하는가.

실에 대한 아무런 변화 없이 명에 대한 토론이 증가하는 현상을 그저 반길 수는 없다. 교황이냐, 교종이냐 하는 논의가 단순히 명에 대한 문제라면 사실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미지 개선을 위해 애쓰기보다 교황 제도의 변화라는 핵심적인 실질에 가톨릭교회가 집중하면 좋겠다. 실을 외면하고 명에 치우치는 논의는 언제나 주변적인 일에 불과하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교황이라는 존재와 의미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라는 개인의 모습에서 ‘교황’이라는 제도의 모습이 가려지면 안 되겠다. ‘선한 독재자’라는 교황 제도는 그 모습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 변화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인류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강우일 주교와 문규현 신부가 교황 대신 교종이라는 호칭을 쓰는 깊은 뜻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지 개선보다 정직함이 우선이라는 원칙에 비추어 교종보다 교황이라는 호칭이 좀 더 정직하고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교황 호칭을 고집하는 반(反)개혁적인 사람들의 의도와 이 글은 아무 관계없다. 교황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역사적 아픔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교회 개혁을 촉구하기 위한 글이다. 호칭(名)을 먼저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용(實)부터 바꾸자는 뜻이다. 내용을 바꾸지 않고 이름만 바꾼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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