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13]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 ‘착한 사마리아인’, 영국 화가 워츠(George Frederick Watts)의 작품
아마 주일학교에서 성탄을 즈음해서 ‘성탄잔치’를 열 때 고학년 어린이들이 단골로 준비하는 연극 주제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오늘(연중 제15주일) 복음의 말씀일 것이다. 요즘에는 그마저도 재미없고 지루해서 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선풍적 인기를 끄는 최신 노래의 노랫말을 바꾸어서 춤을 곁들여 선보이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풍요로운 나라, 우리의 선망이 되는 나라, 자본주의에다가 신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서 세상을 호령하는 나라, 자랑스럽게 우리의 우방이자 혈맹으로서 형님 나라 격인 미국의 텔레비전에서조차 <The Good Samaritan>이란 프로그램까지 있었으니까……. 루카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만큼 유명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은 도시를 배경으로 했을 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여러 사람이 농경 · 목축을 생계수단으로 하며 마을을 형성해서 살고 있다. 서로 이웃집 숟가락, 젓가락이 몇 벌인지 알고 지냈을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이웃집 사람들과 시시콜콜 너무나 서로 잘 알아서 이른바 ‘사생활’ 그 자체가 무의미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10리, 20리 떨어진 이웃 마을에 누가 사는지, 어떤 대소사가 일어났는지 정도는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쯤 해서 사생활이 유의미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강도질이 일어날까? 강도짓을 했다면 그 고을, 그리고 주변 이웃 고을에서 하루라도 살아갈 수 있을까? 얌체 짓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지나가는 사람, 뻔히 알고 지내는 사람,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친인척이 될 법한 누군가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길거리에 내버려 둘 수 있을까? 아무리 상상을 해도 불가능했을 것 같다. 게다가 지역 유지 쯤 되는 레위와 사제가 그 사람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릴 수가 있을까? 그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그 레위와 사제는 틀림없이 그 고을, 이웃 고을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은 둘 중의 하나의 경우였을 것이다. 아무리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그 길이 개미 한 마리 없는 한적한 곳이라 하더라도 강도 만난 그 사람은 아무런 연고도 없으며, 그것도 처음 나타난 철저한 이방인이었거나,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그 길 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매우 낮은 환경이었거나……. 어쩌면 정말로 운도 없게 이 두 경우의 결합이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처지로 굴러 떨어진 셈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도시를 배경으로 삼았을 것이라 상상하는 이유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 설령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지만 외면해도 괜찮을 그런 지리적 환경, 도시가 아닐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지금의 상황에 대입한다면

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오늘날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성찰한다. 몇 가지 수정할 내용이 금세 떠오른다.

첫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여관에 들러 그 강도들을 만난 사람을 잘 보살펴 달라며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한다. (* 성인 남성의 이틀 품삯 정도쯤 되니까 우리 돈으로 얼마쯤 될까? 내년부터 한 시간 시급이 5,000원쯤 되니까 다행히 8시간 일하면 4만원, 이틀이면 8만원, 여관비 4만원, 밥값 5,000원에 서너 끼면 그것도 2~3만원…… 꽤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착한 사람이 길을 떠났는데, 또 강도들을 만난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난다. 그 착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지 않으면, 길 반대쪽으로 수없이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면 가는 길에서 강도들을 만나 초주검이 된 이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밖에 없다면…….

둘째, 강도들이 옷을 빼앗고 때려서 초주검이 되긴 했는데, 길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을 정도가 아니라 겨우 걸어갈 정도로만, 그러니까 살아남을 정도로만 빼앗고 때리는 정도라면……. 그리고 그 힘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길 위에 있다면…….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해 다시 옷을 구해 입고, 간신히 먹거리를 장만하고, 그래서 다시 걸을 만해서 길을 떠났더니 또 같은 강도들을 만나고, 그렇게 생존하다가 주머니에 무엇인가 고일 만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같은 강도들을 만나고……. 마치 계절의 변화처럼 주기적으로 그런다면……. 도처에 강도들이 널려 있다면, 그리고 그 강도들은 곳곳에 연락망을 갖추고 있다면…….

오늘날 루카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성찰하면 앞의 두 요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를 요약하면 불의의 구조 혹은 죄의 구조라 할 수도 있고, 악의 평범함이라 할 수도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의식과 선행이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불의의 구조, 혹은 죄의 구조를 허물고 악의 평범함을 지워야 하는데, 이를 개인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적 · 정치적 애덕’이 요청되는 이유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의 행위, 자비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이웃의 실재적이고 절박한 필요에 응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08항).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도.

“그러나 자기 이웃이 가난에 빠지지 않도록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고자 애쓰는 사랑의 행위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서 이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들과 국민 전체가 가난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거나 실제로 가난이 전 세계적 차원의 사회문제일 때에 특히 그러하다.” (간추린 사회교리 208항)

(** 제도, 법, 사회자원 따위를 말할 것이다. / *** 강도짓 쯤 될 것이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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