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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만/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닉네임
늘벗
등록일
2019-10-07 05:34:19
조회수
799
첨부파일
 2.jpg (149227 Byte)

서구 사회에서는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다른 이의 생명이나 신체에 중대한 위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고도 구조에 나서지 않고 방관하는 경우에 이를 처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있단다. 최근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한 이를 돌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핑계로, 보편적 도덕심을 잃는 위기의 한국 사회를 볼 때에, 나의 ‘이웃에 대한 정의’는 자못 중대하다는 생각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웃은 가까이에 있는 이라는 뜻이다. 이 가까움은 단순한 거리상의 문제를 넘어 혈연, 그리고 친분이 있는 이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과 거의 비슷하게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이방인, 사마리아인 등 나와 관계없는 이는 나의 이웃일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러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율법 교사가 적대시하고 철저히 무시했던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지만, 그가 보여 준 행동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가치를 담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논쟁을 시작한다. 이는 대개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613개의 율법 조항’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지 등은, 이른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쏟는 것들일 게다.

그러나 결국 우리에게 ‘믿는 이’의 자세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사마리아인들은 어쩜 가장 혐오스러운 민족이었다. 그들은 사마리아 함락 뒤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유다인 대신 사마리아로 끌려왔다. 그들은 모세를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신전을 지어 그들의 신을 믿었다.

따라서 유다인들의 눈에는 그들은 배교자로 그들을 너무나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마리아인에게는 처음 보는 유다인이지만 위기에 빠진 이웃이라는 그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시간을 내어 주며, 자상하게 돌본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것이, “당신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었나?”로 물어 본다.

사랑에 합리적 이유를 강요하거나 어떤 제한을 거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에서 진가를 발휘하기에. 우리는 얼마나 조건부 사랑에 익숙한 것인지를 되돌아볼 때다. 예수님은 유다의 철전지 원수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실천을 이웃의 본보기로 비유하였다. 그는 마음과 생각과 목숨을 다하여 초주검으로 버려진 이를 내 몸같이 보살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이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사랑의 기본은 연민이란다. 그 사람의 아픔과 필요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느끼시는 그 마음이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기를 원하는 마음이기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이는 그야말로 행복하다. 그들도 언젠가는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이웃은 과연 누구일까? 정녕 나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만 할 게다. 따라서 ‘지금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까?’를 깊이 생각하자. 그래서 내가 필요로 하는 이가 아닌, 진정 ‘나를 필요로 하는 이’를 찾아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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