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영화 - 진수미]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감독, 2013년작, 현재 상영 중

▲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감독, 2013년작
교도소 감방, 죄수들, 연극 상연……. 이런 키워드로 생각나는 작품이 혹시 있나요?

저는 남아공 극작가 푸가드(Athol Fugard)의 <아일랜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이 작품은 같은 감방에 수감된 두 죄수가 연극 <안티고네>를 상연하는 과정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 속 인간의 자유와 정의에 대해 탐문하는 연극입니다. 이십 년도 넘은 옛날, 작은 소극장에서 보았지만 충격과 감동이 여전히 크게 남아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마누엘 푸익(Manuel Puig)의 소설 <거미 여인의 키스>가 생각납니다. 이 작품에 연극 상연 모티브가 어디 있냐고요? 예. 맞아요. 없습니다. 대신, 미성년자 성추행범 몰리나는 세헤라자드라도 된 것처럼 감방 동료 발렌틴에게 영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줍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사랑을 받았습니다. 몰리나 역을 맡은 윌리엄 허트는 자연스럽게 극과 극을 드나드는 이중적 판타지의 주인공이 됩니다. 좁은 감방 안에서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이 작품 역시 교도소 배경, 죄수들의 극중극이라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감방이라는 제한된 공간
죄수들이 수행하는 연극 속의 연극

여기에 또 하나, 놀라운 작품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타비아니 형제(Taviani Brothers)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그것이지요. 이 작품이 충격적인 것은 다큐적 형식으로 위의 키워드를 모두 충족시켰다는 점입니다. 이탈리아의 중범죄자 교도소 레비비아에 재소 중인 범죄자들이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은 것이지요. 이들은 교화를 목적으로 한 교도소 연극 연출가 파비오 카발리와 함께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준비합니다.

그 결과, 브루투스의 시저 살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이 연극에서 시저 역을 마약 밀매자(지오반니 아르쿠리)가, 모략가 및 살인자인 카시우스 역을 실제 살인자(코시모 레가)가, 브루투스 역을 조직 범죄자(살바토레 스트리아노)가 맡게 됩니다. 이는 여러 아이러니가 개재되는 지점입니다. 고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르네상스기 영국 극작가가 만든 허구 세계를, 현대 이탈리아 감독이 현대적이면서 원초적(primitive)으로, 한편으로는 현실 그 자체이면서도 허구라는 사실과의 긴장 속에서 해석되게끔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탕극에 강한 내러티브와 긴장을 실어주는 극중극 효과

또한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앞서 소개한 두 작품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은 바탕극의 외피가 매우 얇다는 사실입니다. 극중극 형식이란 바탕극 안에 극중극이 내포된 것으로, 이들의 상호연쇄를 통해 바탕극의 사건과 정서를 전개하고 추동시키는 연극적 장치입니다. <아일랜드>에서 내포극(극중극)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되고, 감방의 죄수 존과 윈스턴 이야기는 바탕극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연극의 주된 사건과 갈등은 존과 윈스턴의 것이지 안티고네와 테베의 왕 크레온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이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바탕극, 즉 살바토레 스트리아노, 지오반니 아르쿠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집중하는 것은 <줄리어스 시저>의 연습과 상연 과정입니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범죄 세계를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함인 듯합니다.

영화 제작 중 연기자들은 외부인과 면회를 하고 나면 자신만의 우울함 혹은 감격에 빠져 약속된 연기가 어려워지는 등의, 일반 다큐멘터리가 흥미로워할 지점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타비아니 형제는, 이러한 내용은 제작 과정의 후일담으로 남겨두고, 각본대로 극을 진행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순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각본을 지닌, 페이크다큐이지요.

위반으로서의 예술과
사회적 금기의 위반으로서의 범죄 행위

범죄자들의 실제 삶과의 거리 두기 및 바탕극의 축소는 오히려 <줄리어스 시저>와 <시저는 죽어야 한다> 간 배역과 행위의 유사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직유보다 은유가, 그 어떤 수사보다 때로는 침묵이 더 강력한 울림을 낳듯 말입니다. 브루투스 일당의 살해 모의와 실행이 조직범죄 살인과, 지상의 권력에 도취되었던 시저와 마약 밀매라는 행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극이 종료된 뒤, 우리는 ‘아주 천천히’ 깨닫게 됩니다. 이는 ‘위반의 시학’으로서의 예술과 사회 금기를 깨뜨리는 범죄 행위, 그리고 인간사를 반추해 보기 가장 좋은 속도가 아닐까 합니다.
 

 
진수미 (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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