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배선영]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없는 순간들을 자주 경험하고는 한다. 스스로 피곤해질 정도로 강박적으로 전기코드나 문단속을 확인할 때, 사진으로 찍힌 내 모습을 볼 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제 시간에 완수하지 못했을 때, 나는 내가 끔찍이도 싫어진다. 나를 남과 비교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주 발견하고,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실망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이나 좋은 말을 들어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대한 반응이 오지 않으면 속으로 서운해 한다.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라며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기도 한다. 뛰어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타박하기도 하고, 신체적인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매일 생각하며, 좀 더 나은 내 모습을 상상해보고는 한다. 마치 내 의식은 ‘나’를 저 높은 곳에 데려다 놓지 못해 안달난 것처럼 끊임없이 내가 만든 이상적인 세계의 환상에 빠져든다. 그 ‘환상속의 나’가 왜 ‘진짜 나’가 아니냐며 스스로를 닦달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토록 내가 원하는 모습이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공의 이미지에 세뇌당해 불안해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그 불안에서 벗어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너는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네 존재 자체로 의미 있으며, 남과 너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네가 스스로를 사랑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이런 자기 암시나 위안이 별로 효과적인 것 같지 않다. 스스로의 만족이 아닌 사회나 미디어가 보여주는 성공의 이미지에 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도, 내 안의 깊은 곳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도 될 수만 있다면 저렇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종종 맞닥뜨리게 되곤 하니 말이다.

불행히도 이런 ‘환상속의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괴리는 ‘너’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네가 더 나은 모습의 연인이 되어주길 끊임없이 요구한다. 데이트할 때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주길 바라고, 외모 관리에 대한 조언을 하고, 탈모 방지와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잔소리를 하며, 더 나은 네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기를 기대한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과 영화들을 추천하고,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네 태도에 대해서는, 발전하지 않고 안주하려고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너를 긍정하고 너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 한다. 혹시 내가 하는 행동이 너를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질까 조심스럽고 내 생각이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을 네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내가 스스로에게 겪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너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똑같이 느껴져서 나는 오랫동안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더 나은 모습이 될 너를 사랑한 나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 너

그러나 너는 다르다. 너는 항상 내게 예쁘다고 말한다.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난 오히려 그런 네 모습을 보며 민망해 어쩔 줄 몰라 한다. 도대체 내가 어디가 예쁘다고 저러는 걸까. 연애 초기에는 콩깍지가 씌어 다 예뻐 보일 때니 그러려니 했다(그리고 그때는 나도 네가 멋져 보였다). 하지만 연애를 한 지 2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날 예쁘다고 해주고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네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이지 나는 전혀 예쁜 얼굴이 아닌데, 왜 계속 예쁘다고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예쁜 것을 보고 예쁘다고 해야지, 예쁘지 않은 것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것은 놀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너는 진심으로 날 예뻐하고 있다. 온갖 투정을 다 받아주고, “싫어!”라는 말을 남발하며 심술을 부리는 순간에도 나를 귀엽게 여기고, 내가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을 때조차도 너는 나를 감싸주고 안쓰러워한다.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하고, 괜찮다고 말해주며, 위로해준다. 너는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내 모습까지도 사랑한다. 더 정확히는, 너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이 되어도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나는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너를 사랑했고, 너는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내가 하는 사랑이 옳은 방식인 줄 알았다. 서로가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게 서로를 지원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애쓰며 함께 성장하고, 가까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서로의 단점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 줄 알았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각자 달라진 것은 전혀 없고, 이렇다하게 나아진 점도 없다. 다만 자신이 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요즘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근사한 일인가 느끼곤 한다. 네가 내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나조차도 나를 사랑할 수 없을 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힘이 되는지, 네가 없었다면 몇 만 배는 더 견디기 힘들었을 시간을 보낸 후에야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절히 깨달은 것이다.

▲ “나는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너를 사랑했고, 너는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를 사랑했다. 나는 내가 하는 사랑이 옳은 방식인 줄 알았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이 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사진은 남지중해 몰타, “LOVE”를 뒤집어놓은 조각상 (사진 제공 / Keith Baker)

한 대 때려주고 싶다가도 안쓰러운 ‘나’라는 사람

그러나 나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인정하면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자신의 장점 100가지 적어보기, 매일 큰소리로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기 등을 해보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될까.

나에 대해 알아보고자 참여했던 수많은 프로그램과 강연, 상담들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면의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보낸 시간들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나은 나’가 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니 여전히 나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알아갈수록 자꾸만 움츠러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너’를 본다. 나는 네가 사람을 쉽게 평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나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너는 함부로 싫어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언젠가 너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누군가에 대해 깊이 알게 되면 절대로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너는 늘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같다. 너는 늘 누군가를 이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는 네 자신을 사랑할까? 너는 스스로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고, 사랑하기 힘들지만 차마 미워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한 대 때려주고 싶으나 그러면서 동시에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네 말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스스로를 차마 미워할 수 없듯이 타인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고 측은한 마음으로 대하는 네가 보인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없이 미워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이든 이해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그 누구의 말이라도 귀기울여 들으려고 하나보다.

나는 요즘 나를 안다고 자부했던 지난날들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애써왔던 ‘성장’은 너와 내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혹은 서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나누었던 진심 어린 대화들과 함께 지내온 날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흔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요즘 나는 나를 위해 많이 울고 있다. 나를 이해할수록 내가 많이 안쓰러워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나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배선영 (다리아)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을까를 고민하며 20대를 보냈다.
이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를 고민하며 30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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