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싸움군 박순희

지난 10월 9일 천정연 사무실에서 박순희 선생을 만났다. 며칠 뒤(10월 19일) 그이는 회갑연노동동지와 선후배들이 마련한 회갑상을 받았다. 아울러 「선한 싸움꾼, 박순희」출판 기념회도 열었다(최종수의 사람 사는 이야기 기사 참조). 1967년에 노동현장에 뛰어들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로, 노동운동가로 그리고 노동하는 이들의 대모요 선한 싸움꾼으로 살아온 박순희(아녜스) 선생을 만나 70~80년대의 노동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나의 노동운동은 신앙이 바탕이고 출발이었다.”는 선생이 교회 안에서 펼쳐온 노동사목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사회 부조리를 타파하고 불의에 저항하며 살았으되, 부드러움과 따듯함,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온 그이의 속내도 들어보았다. 선생은 노동운동은 약자 보호운동이고 인간화 운동이라고, 인간답게 살려고 노동운동을 하는 거라고, 그러기에 인간성을 저버린 건 운동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였다(지금여기 편집국).


노동운동을 신앙으로 알고, 현장을 교회로 알고

안녕하세요.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며칠 뒤(10월 19일)에는 평생을 함께해 온 노동계의 동지와 후배들이 회갑연을 겸한 「선한 싸움꾼 박순희」 출판기념회를 여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살아온 지난 한평생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될 터인데 어떤 감회가 드는지요?

삶을, 육십을 그냥 살았구나, 감사하다 그랬는데, 공연히 이런 걸 한다니까 부담스러우면서도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습니다. 좀 더 체계적이고 진솔하게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고….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위해서 피정을 하셨는지요?

피정은 활동하면서 하고 내가 속한 자매회에서도 하고 지난 여름에 2박 3일 피정도 했어요.

여기 오기 전에는 선생님과 나눌 내용을 노동운동 쪽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신 자료를 보면서 신앙과 관련한 운동 쪽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료를 보니 수도생활에 관심이 많으셨고 지금은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시는데 선생님이 속한 ‘성심자매회’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해주십시오.

성심수녀회 창설자 마리 소피 바라의 정신으로 세상 속에서 사는 자매들의 모임이죠. 저는 참 부르심이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영등포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성심수녀회가 원효로에 있어요. 강 하나만 건너면 되죠. 그런데 수녀회에 가려고 많은 수녀회를 다녔는데, 성심수녀회는 안 갔어요. 지금까지 활동을 하면서 부천, 부평, 주안에 있는 노동사목 수녀님들이 다 성심수녀회 수녀님들이에요. 내가 노동사목을 하면서 70년대부터 손인숙 수녀님이나 성심수녀회 수녀님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시대에 필요한 정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수도복도 안 입고 생활하면서 삶의 현장에 필요한 사람들, 현대사목의 정점에서 일하시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했죠.

95년도쯤에 우연한 기회에 당시 관구장 수녀님인 손인숙 수녀님한테 “수녀님들은 성소자가 없다고 그러면서 왜 꼭 수녀만 만들려고 하냐? 세상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한테 창립자의 정신으로 살게 하면 그들이 얼마나 영성적으로 힘내서 살겠느냐? 왜 새파란 젊은이만 찾으려고 하냐?”고 그랬어요. 수녀님이 반색을 하시면서, 그해에 성심수녀회 국제회의에 다녀오셨는데 때마침 그 회의에서 이미 설립된 나라도 있지만 각 나라에 자매회를 설립하기로 했으며, 한국에는 그해에 자매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는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때를 맞추느냐면서 반색을 하시더라구요. 그때가 8월이었는데 10월에 첫모임을 했어요. 제가 그러니까 초창기 멤버죠. 열댓 명이 시작을 했어요. 창설자 삶에 대해서 1년 동안 공부하고 3년을 그렇게 하다가 허원을 했죠. 2005년도에 6년 허원을 하고 이제 종신허원을 하면 됩니다.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저는 한 가지 옳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두렵지 않은 사람인데, 신앙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하게 된 사람이에요. “노동운동을 신앙으로 알고, 현장을 교회로 알고” 제 신조가 그래요.

JOC와 나

“나는 노동운동을 신앙으로 시작하였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에 눈을 뜨기까지는 여러 과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노동운동에 눈을 떠가는 과정, 신앙과 관련한다면 JOC의 역할도 컸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내 경우는 가난해서 못 배우고 못 배워서 가난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똑같은 상황의 연속이었죠. 그때 당시 노동자란 이름이 있기나 했나요? 노동자란 말도 북쪽에서 쓰는 용어라고 못 쓰게 하던 시절이죠. 그저 공장때기, 공장생활 한다고 그랬지, 공돌이 공순이라고 했죠.

내가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안 게 67년도인데, 구로공단 산업박람회 한다고 땅 파고 그럴 때였죠. 우리나라에 가톨릭노동청년회가 1958년도에 들어왔어요. 도요한 신부님을 알게 되어서 JOC 활동을 시작했고 1968년도에 10주년 행사를 도림동에서 했어요. 그때까지도 나는 나는 노동자 아니다 그랬어요.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가졌어요. 아버지가 신앙이 엄격하신 분이라 내가 유아영세를 하고 중학교 나올 때까지 한눈팔 줄을 몰랐죠. 일요일에 성당에 다녀오지 않으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에요.


어려서 나는 선생님이, 그것도 꼭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어요. 형제가 오남매고 아버님은 철도청에 다니셨는데, 가난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하고 공장가는 건 싫지만 형편은 그렇고, 그래서 독학해서 사범대학엘 가겠다고 생각했죠. 아마 노동청년회를 몰랐으면 그 길을 갔을 거예요. 그런 꿈을 꾸면서 앞집에 사는 아저씨 빽으로 양복 기지를 짜는 모직회사엘 들어갔어요. 보통 2~3년을 배워야 기술자가 되는데 저는 1년 안에 기술자가 되어서 대한모방엘 갔어요. 그때는 기도를 아주 많이 했어요.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 진학하지 못하면서 성당엘 안 갔어요. 그리고 성당 구조가 나 같은 근로청소년에 대한 자리가 없었죠. 주일학교 중등부는 있는데 마땅하게 공장에 간 노동자들 프로그램이 없어요. 소속이 없는 거죠. 그런 것도 창피하고, 사춘기 때라 반발심도 나고. 그래서 냉담을 했어요. 그런데도 엄마 아버지가 말씀을 못하셨죠. 학교를 안 보내주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그렇게 대한모방엘 갔어요. 거기서 송숙자 체칠리아라는 친구를 만났죠. 그때 당산동 성당에 JOC 일반회가 있었어요. 그때 내가 교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있었거든요. 이 친구가 공장 다니는 사람들도 하는 모임이 있다고 거기엘 가자고 해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하느님이 어디 있어? 하느님이 있다면 어쩌면 이렇게 기도를 안 들어주시냐? 내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고 하느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세 번을 거절했는데. 네 번째 또 가자고 할 때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어요, 당산동성당에. 거기서 신부님이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설명해 주시는데, 노동의 소중함, 노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이 시작되었다, 노동을 통해서 이 세상이 유지되고 발전된다, 노동하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은 변화될 수 없다고 하시는데 세상이 달라지더라구요. 노동법과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권리를 말씀해 주시는데, 그때 내가 뿅 갔어요. 그때 뿅 간 마음으로 지금까지 사는 거지. 그때 완전히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체험을 내가 했어요.

세상이 새롭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네요.

그럼요. “노동자들이 하느님 창조사업의 조력자고 계승자다, 노동을 통해서 하느님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진짜 존엄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까르댕 추기경의 “이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합친 것보다도 노동자들은 더 소중하다.”고 하신 말씀이 쏙쏙 들어왔어요. 그때 두말할 것도 없어요. 이런 체험을 했으니 그 뒤 내가 아주 열심 하게 된 거죠.

그때부터 새벽 6시에 갔다 2시에 오고 2시에 갔다 10시에 나오고 10시에 갔다 새벽 6시에 나오는데, 틈만 있으면 성당 가서 미사 드리고 성가대 활동하고 JOC 활동하고, 당시 당산동성당에 메리 가별 수녀님이 시작한 신용협동조합이 있었는데 신협 활동도 했어요. 기쁜소식을 접한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 체험을 했죠. 너무 기뻐서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야 하니까 내가 봐도 미쳤었죠.

그렇게 본인은 새 세상을 만나 기쁨에 충만된 삶을 사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자신이 봐도 미쳤다고 생각했을 정도면 주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하지 않던가요?

우리 부모님이 이게 웬일인가 싶었던 거지. 우리 오빠까지 JOC를 하게 했어요. 그전까지는 반항감에 말도 안 듣고 집안에 일이 있어도 시큰둥해했는데 부모님들이 좋아하셨죠. JOC의 첫 번째가 나의 변화고 그 다음 가정의 변화, 그리고 동네의 변화고 세상의 변화거든요. 단계적으로. 내가 변했으니까 가정이 변해야 하잖아. 내가 착실한 딸이 되었으니 부모님이 정말로 좋아하셨죠. 신앙으로 돌아온 것만도 좋은데 그런 변화된 삶을 사니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그때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배운 걸 바로 대한모방에서 실천했어요. 소그룹을 만들었죠. 생활나눔 하는 세븐그룹이라고. 노동자 아닌 척 하면서 가짜 여대생 노릇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다른 사람 옷을 빌려 입고 친구 만나러 나가고, 그런 허영이 많았어요. 욕도 많이 했는데, 욕 안하기, 허영 된 생활하지 않기, 그런 운동을 했어요. 그런 걸 하다보니까 회사에서 조장이 되었어요. 조장노릇을 하다보니 모범적으로 되더라고.

70년대가 되면서 당산동 JOC의 섹션회장이 되고 남부연합회 회장이 되었어요. 그러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들었어요. 근로기준법을 껴안고 분신을 했다는. 내 나이 스물세 살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스물이면 시집을 다 보냈어요. 집에서는 빨리 혼인시켜야겠다고 그러시는데 나는 혼인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어떻게 하면 이런 삶을 좀 더 오랫동안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때까지 JOC를 통해서 변화된 삶에 만족하면서, 내 기쁨을 이웃에 전달하고 아직 노동자라든지 권익이라든지 사회 부조리에는 눈을 뜨지 못했어요.
 

노동은 기도요 작업장은 제대이다

 

내 안의 기쁨을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일에 기쁘게 뛰어다니셨네요.

그렇지, 운동성은 없었어요. 노동은 기도요 작업장은 제대이다, 그러면서 그전에는 노동을 아주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지긋지긋한 노동이 아니라 보람되고 가치 있고 희망이 있는 노동, 그래서 노동을 기쁘게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지옥 같은 노동현장이 아니라 천당 같은 노동현장을 만들어야 된다는 그런 생각도 하고.

그런 현장성에서 운동하는 차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안고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네요?

그러나 그때 전태일 열사를 만나면서는 두려웠어요. 여기 더 있다가는 나도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 나는 저것까지는 못한다는 생각으로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갈등을 많이 했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결혼을 할 것인지, 노동현장에 더욱 적극적일 것인지 아니면 수녀원을 갈 것인지. 이 세 가지를 안고 고민하다가, 내가 결혼을 하면 직장도 그만두고 이 활동도 못하게 되는데 그거는 아니다, 나는 혼인성소는 아니다는 생각을 했죠. 계속 이 정신대로 살려면 노동자들과 같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하는 수녀원엘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으로 수녀원을 찾기 시작했죠.

그래서 한 수녀회에서 1년 동안 성소모임을 하고 72년도 가을에 입회날짜도 잡아놨는데, 하느님의 섭리가 참 묘해요. 그해 여름에 영등포 안양천이 물문을 안 잠가서 물난리가 나서 우리 집이 물에 떠내려갔어요. 초등학교에서 텐트 치고 지냈는데 도저히 수녀회 입회할 형편이 안 되니까 봄으로 미루어주셨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는지 깨달았어요. 내가 성소모임을 다닐 때 수녀원에 가면 정말 좋았어요. 이제 여기서 일생을 산다고 생각하니 즐겁고 말이야. 그런데 장마가 끝나고 성소모임을 갔는데 수녀원에 거부반응이 이는 거예요. 수녀원 건물이 아방궁 같은 거예요. 이렇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해, 이런 게 예수 정신이야? 이건 아니다. 장마에 집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데, 이게 아니다 싶은 거야. 또 다른 현장을 체험한 거죠. 사고가 그렇게 바뀌더라구요. 이렇게 아방궁 같은 데서 살면서 무슨 수녀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내가 진짜 더 가난한 수녀회를 찾았어요. 그러다가 부산에 있는 한 수녀회를 갔어요. 1973년 3월에 입회하기로 했죠. 입회 날짜를 받고는 수녀원 간다고 동네잔치도 다 했어요. 이제 내일이면 보따리 들고 기차만 타면 수녀원엘 가는 거죠. 그런데 그때 영적지도 신부님인 도 요한 신부님이 말리셨어요.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겠기에 신부님한테 인사를 드리려고 갔어요. 신부님이 “말리지는 않겠는데 나랑 체크 좀 하자!” 그러셔요. 지금 보니까 그게 이냐시오 영성 식별법이에요. 서로 종이 한 장에 수녀원에 갔을 때 좋은 점과 나쁜 점, 안 갔을 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적어서 비교하여 나눔을 하자고 하셔요. 나는 자신 있게 수녀원에 갔을 때 장점이 더 많을 줄 알았어요. 한 시간 동안 성당에서 묵상하고 와서 그걸 보는데 내가 봐도 놀랬어요. 나는 지금도 그걸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수녀원 가는 것보다 세상 속에서 노동자로 생활할 때가 할 일도 더 많고 기쁨이 솟아나는 걸 느낀 거예요.

그런데도 어쩌겠어요. 두렵더라구요. 수녀원과 집은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그러니까 신부님이 지금 수녀원에 가는 게 급한 게 아니니 연기를 하자고 하시더라구요. 수녀원에는 신부님이 연락하시고 집안에는 오빠가 말씀드리기로 했어요. 지금도 동네에선 제가 사복 입은 수녀인 줄 알아요.

결혼식장에 들어가지 않은 신부가 된 기분이셨겠어요? 결단은 내렸지만 당혹스러웠을 텐데....

일단은 수녀원 가려고 싸둔 짐을 들고 대방동에 있는 돈 보스꼬 센터로 갔죠. 그리고는 좀 더 활동영역이 깊어지기 시작했어요. 돈보스꼬 센터 앞에 원풍모방(전신 한국모방)이 있었는데 그곳 노동자들이 살레시오 수녀님들과 함께 모임을 했어요. 그때 제가 가톨릭노동청년회 모임 가운데 하나인 무궁화 팀을 맡아서 했어요. 돈 보스꼬 센터에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한국모방 노동자들하고 어울리면서 저녁에는 서강대학교 산업문제연구소와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어요. 산업문제연구소에는 노동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거기도 다니고. JOC 여자 회장들 중심으로 성심회 공동체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그전부터 도요한 신부님과 이야기해 온 노동사목 공동체를 시작했어요. 그해 시월에 가리봉동에 집을 하나 얻어서 메리놀회 수녀님 세 분하고 저 그리고 정인숙 아녜스와 JOC 여자 회장들 중심으로 성심회 공동체를 시작했어요. 이게 프라도의 전신이에요. 그 공동체에서 3년을 살았어요.

1974년 12월에 한국모방이 어용노조에서 민주노조로 태동되는데 지동진 씨가 민주노조 지부장에 뽑혔어요. 그런데 노사가 연말 파티를 하고 나오는데 상무가 지 부장을 두들겨 패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12월 말일에 그랬는데 1월 5일 신구교 합동기도회가 돈보스꼬 센터에서 열렸어요. 성명서 발표하고 구타사건에 대한 기자회견도 하고 신구교 합동 대책위원회가 구성이 되었죠. 그때 기자회견할 때 내가 사회를 봤어요.

그러는 중에 수녀님과 지동진 씨 병문안을 갔어요. 그때 그분이 내가 대한모방에 있었다는 걸 알고 부지부장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한국모방에 들어오라고 제안을 했어요. 당시에 나는 공장 들어갈 생각은 안 하고 있었어요. 일단 공동체 생활에 충실하다가 공동체가 안정이 되면 공장에 들어가서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기로 공동체 식구들과 이야기가 되어 있을 때죠. 그런데 한국모방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모방은 의식화가 되고 활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없는 데 가서 해야지 거길 가냐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지 부장이 “이제 민주노조를 시작했는데, 탄압은 심하고 노동자들의 의식은 땅바닥이고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 군데를 바로 세워놔야 힘이 있다고 지금은 힘을 모을 때지 분산시킬 때가 아니냐고 하는 거예요. 그때 대표적인 노조가 대우자동차 노조였는데, 대우자동차와 한국모방이 제대로 역할을 해서 그런 것들이 다른 데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혼자 결정할 수 없었죠. 가족회의 끝에 일단 이력서를 내기로 했어요. 그때는 빽으로 들어갔어요. 소개하는 사람이 있거나 회사 간부들 통해서 들어가면 관리하기도 좋으니까. 그런 것 없이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들어가는 거다 그랬어요. 기능공을 뽑는다고 하길래 시험을 보러 갔어요. 대한모방에서 조장까지 했으니 내가 실력이 얼마나 좋아. 직포 기술은 오랫동안 익혀야 하는 거라 기술자가 별로 없었는데, 기술도 좋고 시험 보는 자리에서 안면 있는 사람도 만났으니 합격을 했지.

현장에서 일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운동가로서 투신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런 과정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셨나요?

내가 식별을 해나갔죠. 수녀원엘 가려고 하다가 두 번째 무산이 되고 나니 진짜 하느님의 부르심이 어디 있는 건지를 알아야 했어요. 그리고 서강대와 고대에서 공부하면서 운동에 대한 지평이 넓어졌죠. 운동을 통해서 뭔가를 해야 되는구나 하는. 그러면서 그 시기에 새로운 사명감을 느끼면서 내 길은 이 길이구나 하는 운동의 필요성과 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그리고 권리를 획득하지 못한 착취수탈의 구조 속에서 노동자 혼자 멍에를 지는 것이 아니라 구조악을 타파하고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장하게 되었죠. 

민주노조 원풍모방의 돌풍 속에서

그런 신념들을 이제 원풍모방에서 구현하기 시작한 거군요.

원풍에 입사를 해서는 공동체와 갈등이 많았어요. 우리 공동체가 수도공동체를 지향했어요. 그러니까 식사당번도 맡아야 하고 기도생활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어려워졌어요. 원풍모방이 첫 번째 민주노조로 태동하면서 주변에서 요구가 아주 많았어요. 당시 민주노조가 다 탄압을 맞고 있을 때였어요. 평화시장 노조 탄압, 동일방직 똥바가지 뒤집어쓰는 사건 등. 그런데 수녀님들은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원풍은 직장으로서 적당히 거리를 두기를 바라셨어요. 그런데 현장은 그게 아니잖아요. 오죽하면 근로기준법을 껴안고 죽기까지 하는데, 죽지는 못할망정 그래도 뭔가를 열정적으로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었죠. 한 가지를 보면 아주 끝을 보는 성격도 작용했고.

그러다가 내가 원풍에 들어가서 얼마 안 되어 지부장이 방용석 씨로 바뀌었는데 그 양반이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때 입사해서 1년 있다가 대의원이 되었는데, 공동체 가족들은 대의원까지만 하고 노동조합 상근 간부는 안 하는 걸로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상황은 점점 달라지는 거죠. 방 지부장이 구속이 되어 남부경찰서에서 고척동 구치소로 넘어가면서 면회를 오라고 해서 갔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상근부지부장으로 나를 임명하는 거야. 지부장이. 지금 이 어려운 상황에, 당시에는 뭐든지 국가보안법으로 몰아 빨갱이 취급할 땐데. 그러니까 남부경찰서에서 부지부장 임명을 받고 당장 내일부터 상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거죠. 그러니 감옥에 있는 사람 앞에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알았다고 몸이나 잘 추스르고 나올 생각이나 하라고 하고 집으로 오는데 마음이 천근만근이지. 집에 오니까 코가 댓 자들 나왔어요. 그래도 어떡해 그 상황에서. 그래서 방 지부장 나올 때까지만 하는 걸로 하자고 했죠.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내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그때 조합원이 2천 명이 넘었어요. 대회를 하는데 너무 가슴이 뛰어서 진정제 두 알 먹고 시작을 했어요. 무거운 중책을 맡은 책임도 있고, 지부장 직무대행으로 구속된 지부장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맡았으니 앞이 노랗고 캄캄하더라구.

그때부터 날마다 철야를 했어요. 지부장 구속되고 한 달 보름 만에 석방을 시켰는데 그동안 집엘 들어갈 수 없었어요. 도저히 공동체 생활을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나보다 먼저 평화시장 부녀부장으로 있던 정인숙 아녜스가 공동체를 떠났어요. 둘 중에 하나만 해야지 두 가지는 못 한다고 하면서. 그래도 나는 나로 인해서 공동체가 시작되었는데 끝까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책임감 때문에 떠나지를 못 하는 거야. 정말 너무 힘들었어. 너무 신경을 써서 머리 아픈 병이 날 정도로. 그래도 아니다 그랬죠.

수도자로서의 삶보다는 운동가로서 하나씩 성장해 가는 과정인 듯하네요.

성심회가 프라도회 전신인데, 당시 프라도회에 내가 역반응적인 게 뭐냐면, 그때도 문제 제기를 했는데, 프라도회는 노동을 증거하는 회인데, 우리나라는 증거를 너무 해서 노동자가 다 죽게 생긴 거거든. 이제는 증거보다는 증거한 것에 대한 권리를 찾아줘야 해요. 운동이 필요한 거죠. 그런데 뼈 빠지게 일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문젠데, 거기다가 노동을 기쁘게 증거하라고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건 아니다 싶은 거야. 노동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운동을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어긋나더라고. 나는 운동을 통해서 환경이나 조건이나, 잘못된 노동정책과 부딪쳐서 변화시키는 게 내 성소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규정하고 공동체를 나왔어요.

우리의 목소리가 교회를 움직이는 것도 있었어요

유신독재, 군사독재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운동을 하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해 살면서 언제가 제일 어렵고 힘들었나요?

우리 민중들이 구조악과 권력과 금력에 너무 당하고 살았구나, 너무나 왜곡된 역사 속에서 신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때 마음먹기를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내가 죽임을 당하더라도 행복하게, 순교하는 마음으로 죽자, 그래서 서른세 살, 예수님이 서른세 살까지 사셨는데 나도 서른세 살까지만 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 인혁당 사건 등으로 죽임당하고 지 주교님 구속되고, 오골 목사 추방당하고, 오골 목사와는 소모임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준비를 했어요. 죽임을 당하면 영광스럽게 죽는다는 마음으로 일을 했어요.

70년대 사람들은 하루하루 죽음을 살았죠. 그때 우리한테 광명의 빛으로 다가온 게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과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들의 활동이었어요. 그분들은 보이는 하느님이었어요. 신부님과 주교님의 활동을 보고 큰 힘을 얻었죠. 그때는 여러 주교님이 계셨어요. 윤공희 주교님, 두봉 주교님, 지학순 주교님, 김수환 추기경님 등 우리한테 힘이 되시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노동자들 목소리를 많이 들으셨죠. 우리의 목소리가 교회를 움직이는 것도 있었어요. 동방이 똥물 맞는 사건이 일어나자 명동성당에서 단식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였죠. 시국미사 하고 성명서 발표하고 그런 것들이 우리의 힘이었고, 우리가 부르심의 삶을 살도록 해준 촉매역할을 했죠.

칠팔십년대는 교회가 사회문제, 노동자 문제에 적극 뛰어들었어요?

적극적인 것도 아니었어요. 상황이 그러니까, 그때도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래도 어떤 목소리를 냈잖아요. 소외된 사람들 편에서.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안에서 전혀 그런 목소리가 없어졌잖아요. 70년대 이후 줄곧 노동현장에서 일을 해오셨는데, 과거 교회 안에서의 노동의 의미와 90년대 2000년대 들어서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 노동의 의미는 어떤 건가요?

민중의 삶을 살지 않는 교회

창조질서를 제대로 해나가는 거죠. 70년대에는 직접적인 생존권의 문제였어요. 생존권과 인권의 문제가 부합되어서 공감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사람들을 계급적으로 보고 있어요. 노동자는 그 정도 살면 되는 거 아니냐? 뭘 그렇게 따라오려고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한국 교회가 민중의 삶을 살고 있지 않거든요. 교회를 (사실은 우리 신자들이 교회인데) 이끌고 있는 지도부들이 민중의 삶을 몰라요. 민중의 삶을 살고 있지 않거든요. 그냥 너네는 그 정도 살면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서 오히려 차별노동 임금 주고 비정규직 양산하고, 교회가 앞서서 양산해 내잖아요.
 

그런데 그게 우리 성서적으로 봐도, 포도원 일꾼의 품삯만 봐도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왜 두 데나리온을 새벽에 온 사람이나 낮에 온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다 똑같이 주셨겠어요? 그 시대에 사람들이 살아갈 생활비용이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봉사와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착취하고 있어요. 나는 그런 것들이 안타까워요. 복음이 뭡니까? 교회가 빛의 역할, 스승의 역할, 정말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소금의 역할은커녕 부패하게 만들잖아요. 교회가 운영하는 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세요. 사무장들, 관리자들 형편없거든요. 다 비정규직으로 일하잖아요. 노동자들이라고 하면 기절초풍하고. 평화방송 같은 데 노조가 있나요? 있어도 형식적으로 있고.

교회가 먼저 쇄신해야 되어요. 모범을 보여야죠. 그런데 이건 주식회사를 앞서서 주식회사를 하니, 요새는 평화드림이라는 데서 장례업부터 건설업까지 다 한다는 소리를 듣고 망할 징조라고 했어요. 왜 돈 버는 일에 교회가 그렇게 나서는 거냐고요? 그런 건 평신도들이 신앙 정신으로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정말 길잡이 역할만 하면 되는데, 왜 코 묻은 돈까지 다 긁어모으려고 하는지…. 이런 주식회사가 어디 있어요? 완전히 종교주식회사죠. 그것도 독점으로 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살려면 굳이 교회가 사회 속에 있을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이건 악령의 꾐에 넘어갔다 싶더라구요. 우리 교회 정말 희망이 없어요.

희망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도 그렇고 우리가 속한 단체들은 모토가 세상의 복음화와 교회 쇄신이거든요. 세상의 복음화는 운동을 통해서 지평이 많이 넓어졌잖아요. 외침도 커지고. 그런데 교회 쇄신은 철옹성 같아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하는데, 그래도 열심히 계란으로 바위를 쳐야죠. 문을 두드려야죠, 끊임없이.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진리,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그런 믿음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해나가야죠. 그러다보면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들이 번성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요. 나는 확신이 있어요.

그런 확신이 없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교회 쇄신의 물꼬를 트려는 이들이 모여서 ‘지금여기’를 하는데, 제 역할을 해야겠죠. 다시, 교회 안에서 노동운동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전두환이가 총칼로 광주를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뒤 노동법을 제일 먼저 바꿨어요. 그리고 노동운동 하는 사람을 제일 먼저 잡아들였어요. 저 역시 김대중 내란 음모죄로 엮어 잡으려고 해서 도망을 갔죠. 9개월 동안 수배당하다가 지 주교님이 안기부에 가서 3일만 조사를 받으면 된다고 해서 방용석 지부장하고 갔어요. 노동운동 그만두고 공무원 하라고 회유를 하더라구요. 나는 보사부 5급으로 가고 방 지부장은 반공연맹 지부장으로 가라고. 그것 때문에 보름을 버텼어요. 지 주교님이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하고 나와서 싸우자고 해서 쓰고 나왔죠. 이력서 다 쓰고 나왔죠. 또 잡으러 와서 지 주교님한테 피신했다가 너희들이 왜 강제로 이걸 하라고 하느냐 시비 끝에 풀었어요.

전두환이가 그렇게 노동자를 먼저 쳤어요. 노동자를 다 해산시켰죠. 그래서 산별노조를 기업별 노조로 만들었어요. 산별노조는 규모가 크면 힘이 더 주어지니까 각개 격파로 찢어놓은 거죠. 왜 그랬겠어요? 그러면서 노동법을 개악하는데 삼자개입 금지법이란 걸 넣었어요. 노동자 문제에 부모라도 개입을 하면 안돼요. 노동자를 똑똑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 똑똑하면 정권에 위협이 되니까.

제삼자 금지법이 뭐냐면, 이웃사랑 금지법이에요. 그러면 그 법에 누가 제일 먼저 문제제기를 해야 하냐면 바로 교회가 해야 하는 거예요. 주일 지키라고 하지 말고 근로 환경을, 근로조건을 개선시켜야지. 8시간 노동하고 8시간 쉬게 하고. 그것부터 해야 하는 게 교회 아닙니까? 나는 노동자와 교회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필수관계라고 생각해요. 왜? 나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노동을 통해서 했기 때문에. 노동과 교회는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예요. 모든 운동 중에 핵심이 노동자 운동이에요. 인간의 존엄한 생명력이 들어있거든요. 소나 말이나 돼지더러 노동을 한다고는 안 해요. 유일하게 노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에요.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중요성이 같이 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는 필수적으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된다 이거죠. 그게 예수님 정신이에요. 그런데 그 반대로 가잖아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사랑이 으뜸 계명 아닙니까? 내가 삼자개입 금지법 때문에 1년 6개월 받고 감옥 간 거거든요. 원풍에서 내가 해고되었죠. 노동자들이 의식화되어서 단결이 잘 되었어요. 정부의 탄압으로 노조 집행부가 세 번이나 떨려났어요. 집행부 모두 김대중 내란 음모죄에 연루시켜서 보안사에 끌고 가서는 강제로 사표 쓰게 하고 기숙사에서 짐을 끌어내서 시골집에 안마당까지 갖다 놨거든. 2차로 집행부를 해고시키고 또 3차로. 우리 원풍노조 같은 경우는 여성들 결혼하는 걸 연기하고 유보하면서 운동했어요. 그렇게 해도 안 되니까 문화방송 한국방송 앞세워서 노동조합을 뺏었어요. 9월 27일 추석 휴가 끼고서. 그러면서 마지막 민주노조를 박살낸 거죠. 내가 그 조합원들 도와주었다고 해서 삼자개입 금지법으로 감옥 간 거거든요.

나는 하느님한테 가면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에요. 이웃사랑 금지법에 항거해서 감옥에 간 거니까. 신부님 수녀님들한테 이 이야기하면 꼼짝 못해요. “이웃사랑 금지법이 있는데 당신들 우선적으로 할 게 그거 아니냐?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악법이 있는데 그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정말 최후의 심판에 어떻게 심판받을 것이냐?”고. 근로조건도 그래요. 일요일 출근하지 않으면 이튿날 가서 시말서 쓰고 시말서 세 번 쓰면 해고예요. 그 엄청난 걸 각오하고 교회를 와야 하는데 교회만 오라고? 지금도 그런 데 많아요.

나는 하느님한테 가면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에요

노동자들의 의식은 어떻게 바뀌어 갔나요? 70~80년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대상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의식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아직도 멀었죠. 우리나라 노동자가 천오백만이라고 하는데, 한국노총 민주노총 합해야 10.3%야. 10%밖에 가입이 안 되었어요. 빙산의 일각이죠. 의식이나 조직률이 너무 떨어지죠. 선진국이 되려면 적어도 25%가 돼야 해요. 그런데도 노동자들이 힘을 편다고 그러는데, 다 돈 장난을 하는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의 술수예요. 거기에 우리가 넘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노동조합을 통해서 개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돈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 편을 드니 한심하죠.

한편으로는 한국노총이나 민노총이 정말 노동자의 권익보다는 귀족노조 귀족노동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거 아니냐는 비판을 하잖아요?

그것도 만들어낸 거예요.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지만 90% 왜곡이에요. 그리고 대공장 노동자들이 연봉 오륙천 받으면 안 되나요? 보통 관공서 공무원들 오륙천 받지 않나요? 그리고 의사니 전문가들 얼마를 받아요? 왜 노동자들이 받는 것만 많이 받는다고 아우성인지….

우리나라는 임금 격차가 너무 심해요. 이것을 평준화해야죠. 의사되었기 때문에 변호사기 때문에 억대를 받아도 되고, 노동자는 몇 십 년을 해도 못 받는 거 당연하게 여기고. 지금 노동자들 석사 박사 수준이에요. 예전하고 달라요. 대공장 최저학력이 고등학교고 보통 대학 출신이에요. 그런데 왜 연봉 오륙천 못 받아야 하는지…. 그것도 빙산의 일각이에요. 그런데 왜 빙산의 일각을 가지고 깨춤을 추냐고요?

임금을 평준화시켜야 해요. 의사나 변호사나 교수나 똑같은 경력에 비슷한 은 임금을 받아야죠. 청소하는 사람들은 왜 저임금 받아야 해요? 이것 틀려먹은 거예요. 이걸 고쳐야 해요. 포도원 일꾼의 품삯처럼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해서, 노동을 통해서 자기 생활이 되어야 해요. 문화생활도 하고 가정생활도 하고 여가생활도 해야 돼요. 70년대에는 그게 생계비 수준이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게 같이 되어야 하는 거죠. 자기들은 그걸 누려야 되고 노동자들은 생계비만 가지고도 행복해하라는 건데, 왜 그래야 해요?

교수, 의사, 변호사 임금은 내리고 못 받는 이들은 끌어올려서 중간지점을 찾는 게 우리 교회의 역할이에요. 너무 올라간 사람들 거는 내리고 너무 밑에 있는 사람들 것은 올리고 이 밸런스를 맞추는 것을 하는 게 교회의 역할인데, 교회가 더 하니. 그래서 나는 노동자들이 많이 받는다고 하는 것은 권력과 금력이 끌고 가는 함정이라고 봐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 국민들은 깨춤을 추는 거예요.

못 배웠으니까 노동자 되고 노동자 되었기 때문에 또 돈 못 벌고, 이렇기 때문에 논밭 팔아 집 팔아서 애들 공부시켜 석사박사 만들어놓으니까 다 어떻게 되었어요. 다 비정규직이에요. 똑같은 일을 하고도 임금 삼분의 일밖에 못 받는, 그러니까 뭘 모르는 거예요. 아직도 멀었어요, 의식화되려면. 자기 집에 비정규직이 한 사람도 없는 집이 없어요. 그 일로는 흥분들 하면서, 그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투쟁하는 건 못마땅해하고. 오죽해야 투쟁하겠어? 현장에서 일하는 게 훨씬 낫거든요. 구호 외치고, 투쟁하고 아스팔트 농사짓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교회 정신으로도 배워서 남 줘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요? 남과 더불어서 다 같이 잘 살기 위해서죠. 자라면서 못 배운 사람에 비해서 배운 사람은 이미 혜택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배워서 남 주는 정신을 살려 나가야 한다고 보는데.

노동자들한테 노동운동이나 모든 운동은 반짝 세일이 아니라고

노동자들한테 노동운동이나 모든 운동은 반짝 세일이 아니라고 해요. 나의 삶과 함께 가는 것이다, 일생을 하는 것이다, 내가 못 하면 우리 후배가, 후배가 못 하면 후세대가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긍지로 삼을 것은 “세상의 변화는 생산 역사의 변화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바뀌지, 돈 있고 금력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냥 그걸 보장받고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가지지 못하고 짓눌린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하니 거꾸로 된 거죠. 이 의식을 깨워야 해요.

교회의 구태의연한 태도와 바람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의 태도에 실망하셨으면서도 꾸준히 교회 안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전주교구 노동사목, 대전지역 노동사목,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전국위원회 상임대표 일을 하시면서 꾸준히 교회 안에서 노동운동을 하셨습니다.

교회에는 분명 금은보화가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 힘 때문에 우리가 일하고 운동하는 거죠. 실제로 현장을 알려고 하는 신학생이나 수녀님도 많고, 전문가도 많이 있고.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도 힘을 받는 것은 교회 지원 하나도 안 받는다는 거예요. 이 뜻을 신봉하고, 신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운영하는 거죠. 이곳에 있는 단체들이 천주교 NGO 단체들 아닙니까? 그러면서 교회의 소금역할을 하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70년대에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많은 사람들한테 어둠을 뚫게 하고 희망을 주어서 그때 우리 젊은 신자들이 많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간접선교를 하는 사람들이에요. 직접 선교는 성당으로 이끌고 예비자 교리 받게 하고 그러는 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아, 저 사람들은 왜 다를까 했더니, 왜 힘이 있을까 했는데 아 저런 게 있구나!” 해서 신자 되는 사람 많아요. 그리고 이 일을 지지하는 사람도 많고. 전주도 그렇고 부평 주안 부천 성남 이런 곳의 노동사목 현장에 수많은 수녀님이나 신부님 신학생들이 현장체험하러 와요. 현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들과 생활하면서 변화하고 관계를 맺고 영적으로 지원해 주고. 그렇게 맞물려 가는 거죠. 그리고 간접선교를 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나가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들이 기쁨을 체험해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게 다른 거죠.

교회에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들한테

교회에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들한테, 당신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고 설득을 하신다면?

교회 가면 지옥천당을 이야기하는데, 지옥 천당은 죽어서 있는 게 아니죠. 현실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삶을 사는 거죠. 하루하루를 지옥을 살 거냐, 천당을 살 거냐 하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한테 와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거죠. 하느님 나라의 삶은 여기에 있는 거예요, 나한테. 그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들이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쇄신시키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노동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적 약자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와는 어떻게 연대를 하고 있는지요?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우리 70년대 노동자들 상황보다 더 하지. 말도 통하지 않고. 80년대 중반에 이주노동자가 들어올 때부터 이주노동자 사목을 했어요.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은 약자 보호운동이고 인간화 운동이에요. 정말 인간답게 살려고 노동운동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성을 저버린 건 운동이 아니에요. 그거는 그야말로 자기 사유를 챙기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노동귀족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노동귀족 되기 쉬워요. 마음만 바꾸면. 나 같은 경우, 공장 줄 테니 운영해 보라고 하고 공무원 되라고 하고.

개개인의 변화,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다가 세상을 마감할 것이냐, 그냥 물질이나 권력의 유혹에 휘둘려서 자기 동료나 노동자들을 짓밟고 살 거냐 하는 것은 자기가 식별해야 하는 거죠. 거기에 신앙이라는 복음의 씨앗을 넣어야죠. 신앙인이 다른 게 뭐예요. 다른 사람은 돈이나 세상의 것을 우선시하는데, 신앙인은 아니잖아요. 세상 속에 살면서 하느님의 것을 우선하는 사람들이 신앙인 아니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의 길로 따르는 사람들, 그러려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데, 그 달라지는 거에 대한 보상은 무엇으로 하냐면, 그야말로 성령의 이끄심이죠. 신앙과 깊이 연결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안 나오는 거죠.

사실 사리사욕 채우고 입신출세하고 이런 것은 길게 안 가더라고요. 우선은 잘사는 것 같지만 말로나 중간을 보면 기쁘지 않아요. 나는 그런 체험을 많이 했어요. 하느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식별하는 훈련을 통해서 자기 연마를, 그게 바로 기도생활 아니겠어요. 기도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연마하고, 연마된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한테 증거해야죠.

70~80년대에는 왕성하게 활동하던 JOC가 지금은 다 죽었잖아요. 노동운동의 지평이 넓어지고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뜨고 성장한 반면에, 신앙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노동청년회가 노동자나 기층민중자들에게 먹혀들지 않고 있어요. 가톨릭 노동사목이나 천주교 NGO 활동하는 신앙인들은 끊임없이 지향점을 하느님에게 두죠. 하느님의 나라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아버지의 뜻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에 주목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왜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을 교회로 오라고만 하느냐? 가야 된다. 예수님이 괜히 집집마다 다니시고 민중들을 길거리에서 만나신 줄 아느냐? 현장엘 가신 거다. 현장에 교회가 가야지 왜 오라고 합니까? 교회가 가야 합니다.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라 찾아가는 교회가 필요한 거죠.

건물 안에 갇힌 교회가 아니라 현장 속에 있는 교회, 찾아가는 교회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같은 질문을 하는데, 노동운동이 이주노동자들과 어떤 연대성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언론에 비치지 않고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연대 많이 하고 있어요. NGO 단체에서는 벌써 이주노동자와 연계해 활동을 하고 있고요. 교회에서는 역전이 되어서 한국 노동자들 문제는 없어요. 이주노동자들 문제만 있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체불임금, 상해환자들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일들 말입니다.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동운동을 해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해서도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요?

물론 법과 제도를 고쳐야죠. 작업도 하고 있어요. 지금 민주노총에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특위가 따로 있어요. 그들을 위한 법, 출입국 관리소의 악법들을 바꾸려는 작업을 하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어요. 사실은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해서 붐을 일으켜야 합니다. 70년대에 우리도 독일에 광부나 간호사로 노동자들이 갔을 때 거기서는 똑같이 대우해 줬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완전히 이주노동자들을 착취의 도구로 쓰고 있잖아요. 그렇게 착취의 도구로 썼기 때문에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그 피해가 우리한테 돌아오고 있어요. 지금 대학 나온 사람은 이주노동자들 때문에 그 일자리마저 못 들어가잖아요. 이주노동자 임금이 싸기 때문에. 그러니까 서로 갉아먹는 걸 모르는 거죠.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끼리 코피 터지게 하는 겁니다. 노동자끼리 싸움을 붙이는 거죠. 그것을 이길 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서로 뜯어먹고 있으니 기가 막힌 거죠.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니까 월급이 싸다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한다는 게 정말 불의한 거 아닌가요? 싼노동자들이란 표현이 정말 불의한 거 아닌가요?

3D 업종을 안 한다는 거죠. 그 일을 70년대에는 한국 노동자들이 다 했어요. 전 지금도 노동은 신성한 거라고 생각해요.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결실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왜 높고 낮음을 따지고 귀천을 따지냐, 그건 아니다. 이게 잘못된 사회구조와 제도와 법적인 것과 인식 때문에 그런 건데 이것을 변화하는 운동을 해야 해요. 그러려면 청소부로 10년을 한 사람이나 의사로 10년을 한 사람의 임금이 생활비로 같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의사가 문화생활을 하면 청소부도 문화생활을 해야 하는 거죠. 청소부로 일한 사람은 음악회가 뭔지 티켓 한 번 보지 못하잖아요. 교수나 변호사들은 그것은 자기 몫이라고 생각하고. 이게 균형이 깨진 거죠. 우리가 할 일이 끊임없이 많아요. 진짜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무임승차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노동의 신성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그들과 함께했을 때 예수님이 살아나시는 거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람들간의 격차라는 게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격차가 있다면 그 차이를 없애야 하고 그 누구보다 교회가 그런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도 해주셨습니다. 창조사업의 조력자로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인 노동자 농민들을 위해 격려하고 박수쳐 주는 일도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미흡한 가운데서도 교회에는 많은 금은보화가 있고 희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희망을 이끌어내고 일구어가는 일을 지금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이 해내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을 현장에서 지금까지 투쟁하고 외쳐온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박오늘 2007.11.06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