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이지 않은, 그러나 일상처럼 느끼게 하는..


영화 <맘마미아>를 보면서 나는 웃고 울었다. 퇴색된 젊음에 대한 그리움으로 안타까움 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신비스런 바다와 섬풍경,그리고 섬마을 사람들의 삶의 향기에 취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도 나를 좌석에 묶어두었던 것은 무엇보다 ‘인생’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화면 뒤의 숨겨진 이야기에 더 마음에 갔다는 말이다. <맘마미아>는 음악에 취하고 경치에 취하여 흥겹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고, 또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요즘 방송 드라마를 보면 불쑥불쑥 화가 치민다. 어느 방송국 할 것 없이 드라마에 여지없이 파혼이 등장한다. 이혼이 흔한 드라마의 장치가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파혼 또한 드라마의 흥미를 위한 고정장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새로 시작한 일일드라마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혼외자녀를 내세우고 있다.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과 MBC 일일드라마 <울지마, 사랑해>에서는 똑같이 혼외자녀를 등장시켰다. <아내의 유혹>에서는 친구 남편과 사랑에 빠진 여자가 급기야 프랑스에서 낳아 길렀다는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나타나 친구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라 공표한다. <울지마, 사랑해>에서도 결혼을 앞둔 전도창창한 젊은 교수가 졸지에 미혼부가 되어버린다. 미국 유학 중에 사귀었던 여자가 여섯 살(?)난 아들을 데리고 귀국해 아들만 아빠 곁에 떨궈두고 돌아가버린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그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부딪혔을 일상의 ‘삶’과 ‘생활’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얼마 전 종영된 MBC 일일드라마 <춘자네 경사났네>와 요즘도 인기리에 방영되는 KBS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별다른 갈등이나 책임감 없이 약혼녀에게 파혼을 선언한다. 더 ‘사랑’하는 여자를 선택하기 위해.

약혼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야말로 혼인을 약속하는 것이 아닌가. 혹자는 결혼을 약속한 약혼뿐 아니라 실제 백년가약을 약속하는 혼약을 맺고도 서로 맞지 않으면 이혼도 하는데, 파혼이 무에 문제가 되느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선택은 어차피 개인이 하는 것이고 그 책임 또한 개인이 스스로 지게 된다. 이혼도 그렇고 파혼도 그렇고, 요즘 흔히 쓰이는 싱글맘 역시 개인의 삶이기에 딱히 뭐라 할 만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방송에서 버젓이,그것도 흔한 소재로 사용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드라마에서 파혼이니,혼외자녀니 하면서 그런 것들을 ‘사랑’이나 ‘행복’으로 미화하고, 그것이 전체 드라마의 큰 줄기를 이루며 이끌어 갈 때, 시청자들은 알게 모르게 세뇌될 수 있다. 무의식 속에서 약속의 중요함보다는 ‘개인 행복’을 위해 약속쯤은 파기할 수 있다는 자기 변명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삶의 틀을 형성하는 ‘사회규범’이라는 큰 틀 속에 아주 미미하지만 작은 균열이 생길 빌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필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설정이 나와 식상하다 못해 짜증스럽기도 한데 그 소재로 인한 파장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두렵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내가 <맘마미아>를 보고 한동안 자리에 못박힌듯 앉아 있었던 것은 주인공 모녀가 일반 가정과는 조금 다른 싱글맘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홀로 아이를 낳아 20년을 키우면서 받았을 상처와 아픔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 또한 세월은 녹녹치 않고, 인생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 흥겨움 속에 가려진 삶의 애환을 굳이 느꼈듯이 흥미를 위한 장치이건, 소재의 빈곤 때문에 써먹는 것이든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경각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흔히 드라마는 시대의 트랜드라고 한다. 파혼도, 혼외자녀도 이제 낯설지 않은 우리의 주변이 되어가고 있고, 실제로 그들이 우리의 소중한 이웃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의 소재를 선택할 때에는 시청률에 앞서 여전히 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파장을 염려하는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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