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 하나.

“다들 천사 같은 모습이에요” 필자가 16살 때 충북 음성에 위치한 큰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한 뒤 사람들과 나눈 소감 한 마디이다. 필자는 과연 누굴 보고 “천사”같다고 한 것일까.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애인들을 보고 한 말이다. 10년 전의 나는 장애인들을 “천사”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고백 두울.

필자 :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에게 밥을 먹이며) “너는 몇 살이니??”

생활인 : 19살. (허걱. 필자보다 3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너”라고 부르고 있었다.)

인권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고는 창피해서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를 용기 내어 적어보았다. 필자는 16살 때, 충북 음성에 있는 “ㄲ” 시설로 봉사활동을 갔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건데, 나는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애인들을 “천사”라고 생각했고, 시설 생활인들은 나보다도 한참 “모자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도 “장애인”은 ‘그 누구보다도 맑고 순수하며 우리가 항상 챙겨주고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배웠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나는 당연히 그/그녀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10년이 지나 다시 “ㄲ”시설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곳은 “천사”들이 있는 집이 아니었다. 모두 똑같이 빡빡 밀어버린 헤어스타일(부끄러운 고백 두울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라면, 모두 똑같은 헤어스타일이라 도저히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라면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을 것 같은 식단, 목욕을 시켜준다며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주어야 하는 장애인들, 자신만의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십여 명씩 들어가 있는 방, 딱히 할 것도 없어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생활인들. 그곳은 결코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었다. 그/그녀들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기보다, 필자같이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며 그런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내가 또 착한사람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자주 자신보다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도와줌’이 그들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착각이 만들어내는 사회의식과 제도, 편견의 결과를 생각해본다면 그 착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도와줌’과 ‘권리보장’의 경계에서 우리는 당사자의 시선이 아닌 나만의 시선으로 ‘도와줌’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휠체어가 넘을 수 없는 문턱 앞에서 그 휠체어를 밀어주는 나의 만족감을 위해 문턱을 없애고 경사로를 만들면 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많은 장애인들은 ‘천사’가 되기 위해 시설 속에,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갇히고 있다. “우리가 이 정도 베풀었으면 그 정도의 인권침해는 눈감아 줄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라면 저렇게 사는 게 인간답게 사는 것 같소?” 라고.




배여진 / 200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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