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평화: 변화된 한국 사회의 문제와 가톨릭교회

 
이 글은 지난 10월 29일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주최한 심포지엄 자료이며,
한국교회를 진단한 기획위원회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이 글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70-80년대 한국가톨릭교회는 사제단을 중심으로 부당한 독재체제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민중들의 고난의 여정에 함께 해왔다. 70년대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노동자, 농민, 학생들의 생사를 건 오랜 저항의 역사에 한국교회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80년 “민주화의 봄”이 좌절되고 전두환 군부독재의 출현, 5·18 광주 민주화항쟁, 부산미문화원 사건, 권인숙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호헌철폐운동, 87년 명동성당 농성과 6월항쟁 등 민주화의 중요한 고비마다 가톨릭교회는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 사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교회가 단순히 사회적 참여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각 교구별로 노동자, 농민, 빈민사목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 졌으며 공인·비공인을 넘어서서 전국적 단위를 구성하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노동사목협의회,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톨릭농민회, 천주교도시빈민회 등은 중요한 액션단체로 성장하면서 민중들과의 연대에 힘써왔다.

한국가톨릭교회의 사회적 참여는 단순히 우리사회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참여라는 의미를 넘어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후 교회는 사회복음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고, 또 평신도 운동의 지속적 성장을 이루어왔다. 여기에는 교회안의 구원이라는 좁은 시야를 뛰어넘어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라는 가르침에 따라 복음화의 사명을 시대와 사회에 구체적으로 확대 이해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80년대의 민주화와 정의, 평화와 통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교회의 선언과 참여는 우리 사회전체로 돌려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위상과 영향력, 교세확장에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험난한 길을 걸어오는데 교회 전체가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제도교회의 상층부인 주교회의는 교회의 사회적 참여를 정치적 행위로 인식했고, 이로 인해 때때로 보이지 않는 충돌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모순에서 시대적 표징을 읽어내고 실천에 옮긴 종교인들과 평신도들의 수고는 한국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이렇게 교회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결국 87년 민주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커다란 격변을 이루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는 미진하나마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갖추었고 진전된 정치적 지형 변화를 이루었다.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일정한 성장을 가져왔지만 권력의 변화가 곧바로 노동자, 농민 등에 대한 분배와 평등한 가치 등 생존권 요구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차례의 권력교체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더욱 구조화되어가는 양극화와 비정규직 차별문제, IMF이후 시장개방, 최근의 FTA등 세계자본주의를 선도하는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 불평등한 정치, 경제주권의 상실, 정체된 남북관계. 고용불안과 실업문제 등 한국사회는 점점 더 “갈등의 블랙홀”로 빠져들게 되었다.

민중들의 힘에 의해 얻어진 87년 6월항쟁 이후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는 이전보다 더 심한 양극화와 계급 갈등이 확대되었다. 이는 소위 문민·국민·참여정부의 정치적 과실과 무능, 권력보다 더 강한 자본, 왜곡된 언론, 수구주의 부활, 경제적 불평등을 일으키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등에 그 부분적 원인이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아직 우리사회에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할만한 주체세력이 미흡한 것이 더 커다란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87년 이후 9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수구화가 확대되는 경향은 교회 역시 비껴갈 수 없었다. 87년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교회의 신자 구성은 이전보다 중산층이 더욱 확대되고 사회 기득권층이 교회 내에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주교회의 등 교회의 지도층 역시 수구화되는 경향이 점차적으로 높아지게 되었다. 87년 이후 시민사회 운동의 성장에 따라 교회의 사회적 참여가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존재하나 그것이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 축소된 가장 큰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변화된 시대의 징표와 그 안에서 복음적 가치를 제대로 식별하고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87년 이후 교회는 교회와 사회를 하나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구분하는 이중적 복음관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찾기 보다는 분리하면서, 교회 내적인 차원의 성장우선주의와 개인적 구원, 개인 영성운동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내외의 수구화 흐름은 90년대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천년 이후에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중대한 문제를 식별하고 복음의 눈으로 해석하는 것을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 평화와 인권의 교두보 - 냉전의 유산, 국가보안법 폐지

교회의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폐지운동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보법은 우리 사회가 정말 민주화가 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기준이 되었다. 과거의 독재정권들이 국보법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한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문과 조작 심지어는 사형까지 서슴지 않고 저질렀던 것이 국보법이다. 1975년 국가보안법으로 간첩이라는 죄를 덮어 씌워 죽임을 당한 8명의 인혁당 사형수들은 30년이 지나서 무죄라는 판결을 받았다. 30년이 넘게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온갖 고통을 주었다. 그 가족들은 그동안 편안히 숨 쉴 수가 없었다. 가족들에 대한 국정원장의 사과도 있었지만, 무고한 죽임을 당한 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도 적지 않은 국보법 관련 수감자들이 구속되어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다.

교회적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이 주신 인권과 생명, 이웃에 대한 사랑, 평화를 이루는 의지를 누구도 거부 할 수 없다. 그래서 국보법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악법이다. 학자들은 국보법을 이 시대의 마지막 냉전 유물이라고 한다. 수구세력과 냉전론자들은 국보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용했다. 소위 개혁세력이라고 자칭하는 정치권 역시 이를 국민정서를 이유 삼아 똑같이 이용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2004년 겨울, 여의도에서는 국보법 폐지를 위해 전국에서 1천여 명의 사회단체 회원들이 모여 20일이 넘는 단식을 하였다. 국보법폐지천주교연대 회원들도 다수 있었다. 천주교연대는 가톨릭농민회, 천주교 인권위원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포함되어 있는 단체이다. 사제들은 성탄미사를 추운 겨울 농성장 앞에서 봉헌하였다. 사제들은 “예수가 탄생한 것은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온 것”이며 “하늘나라에 없는 국보법이 이 땅에서도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천주교연대는 “사제, 수도자, 신도들이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에는 없는 법인 국보법을 폐지하는 일이야말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요, 의무일 것”이라며 “국보법 폐지로 인권국가와 통일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교회 최고지도자인 추기경은 야당 대표를 만나 “국보법은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이러한 발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수구적 개신교의 한기총 소속 교단 인사들이 신도들을 동원하여 시청 앞마당에서 우익세력과 수구 정치인들과 함께 미대통령 사진을 들고 성조기를 휘날리는 광경이 오늘날 기독교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이렇듯 교회가 예수의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숭미반공의 왜곡된 가치관에 길들이게 하여 또 하나의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21세기이다. 이제 이데올로기·전쟁·제국의 시대가 다시 세계를 좌우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 역시, 21세기에 걸맞은 미래 비전을 갖지 않는 한 갈등과 전쟁, 억압과 소외의 구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6·15공동선언이후 남북은 변하고 있다.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1백만이 넘은지 오래다.7) 개성의 수천만 평의 공장에 남북한의 노동자들이 같이 일하고 있다. 이제 북미 간에 평화협정 체결을 준비하고 있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수구의 밑거름이 마련되어 정치, 경제, 민간사회의 남북교류는 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민족의 미래이다.

교회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가르치고 있다(마태 5,9). 남한과 북한이 국가예산 가운데 엄청난 비용을 무기경쟁에 쏟아 붇고 서로를 적이라 규정하고 전쟁연습을 하며 적대적인 관계를 해소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교회가 남과 북이 한 형제이며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또한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제자라 말할 수 없다. 통일로 가기 위한 길목에서, 참다운 민주주의를 위해서 너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2. 생명의 연대 - 새만금 갯벌 살리기

자본주의 사회는 개발과 성장, 이익과 효율을 위해서는 가릴 것이 없다. 새만금을 보호하는 것은 어부들의 생존권과 동시에 무조건적인 개발로 인해 허물어져가는 자연생태계를 지키는 일이었다. 생명과 평화를 위해 걸어야 하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했다. 새만금갯벌을 살리기 위해 2001년 새만금 생명평화연대가 만들어 졌고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등 종교계와 지역운동단체, 환경시민단체 등 200여개의 사회운동단체가 참여하였다.

정부와 한국농촌공사는 새만금 간척사업을 농지조성이란 명목 하에 세금을 퍼부어가며 진행하였고 수많은 주민들과 갯벌의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새만금을 살리는 운동의 첫 출발은 문규현 신부와 종파를 뛰어넘는 연대를 통해 실현되었다. 교회와 환경, 교회와 생명 그리고 교회와 성장지상주의. 개발이라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강력한 메시지가 새만금 갯벌 살리기에서 성찰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얼마나 희생적이고 자본주의 가치관을 넘어서야 하는 것인가를 알게 하였다. 성찰과 침묵, 오롯이 자신을 바쳐서 걷는 “삼보일배”는 생명평화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64일에 걸친 부안에서 서울까지 305km의 삼보일보의 고행의 길은 그 자체로 장엄한 의식이었다. 문규현 신부는 새만금 살리기에 대한 진정성을 고행의 첫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장문이지만 인용해본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귓전에는 지하철 참사로 희생된 죽음들과 죄 없는 새만금 갯벌과 죄 없는 이라크인들의 고통이 같은 울림으로 메아리칩니다. 그것들은 연민과 사랑을 잃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죄악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별개의 사건 같지만 모두 똑같은 야만스런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물질지상주의가 생명의 존엄성과 귀함 위에 군림하는 모습입니다. 가볍고 쉽게 살려는, 나 하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반그리스도적인 행태가 만연한 탓입니다. 결국 바로 우리 자신과 공동체 모두가 그 대가를 참으로 비싸게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죄도 없던 예수님을 강도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치던 군중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군중들 속에 바로 우리 자신도 함께 서서 고함치고 손가락질하고 있음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끝없는 욕심과 눈앞의 편리함만을 쫓는 태도가 무고한 새만금 갯벌을 죽이고 무고한 자연을 파괴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쟁놀이로 인해 죽어 가는 이라크 양민들과 어린이들의 고통은 바로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허용한 것입니다. 총성과 떼죽음, 그리고 제발 전쟁을 중단해달라는 이라크 양민들의 피 어린 호소를 함께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길을 떠나겠습니다. 우리가 새만금 갯벌을 살릴 수 있다면, 소리 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들의 소중함과 귀함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참혹한 전쟁도, 저 터무니없는 죽음과 공포의 행진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신부의 고백에서 발견되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평화에 대한 가치관은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결국 새만금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법적 판단이 동원되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그 끝은 개발의 환상이 얼마나 허구적인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최근 전북도는 새만금지구에 미국 머틀비치와 같은 대규모 골프장을 건설할 계획을 지역 국회의원과의 정책 간담회 자리에서 밝혔다고 한다. 갯벌을 메워 골프장 만들겠다고 새만금종합개발특별법을 내달라 하고, 도민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끊임없이 던져주는 그들의 발상이 기이하기조차 하다. 천혜의 자원을 죽이고 메운 갯벌에 만들어 지는 개발이 고작 골프장인가? 와중에 전북도는 새만금을 세계에 알리고 친환경적으로 개발의지를 표방하기 위해 새만금 락(樂)페스티발을 열었다. 참으로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바닷길과 갯벌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린 그들은 죽음의 방조제를 만들어 놓고 친환경이라고 우롱하며 세계에 자랑하겠다는 관료들의 태도는 실망을 넘어 희생당한 어민들을 좌절하게 한다. 그간 교회의 사회적 참여는 정치체제와 민주주의 완성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앞으로 더불어 가는 공동체 사회를 위해서는 자연 환경과 생명, 평화의 화두에 대해 더 깊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복음적 가치관은 더 확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3. 평화를 택하라! -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은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칼과 창으로 낫과 보습’을 만드는(이사 2,4), 즉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이다.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만도 아니요, 적대세력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정확히 말해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평택미군기지는 기존 459만평에 팽성읍 349만평을 더해서 808만평의 거대한 군사기지를 건설하겠다는 한미동맹의 약속이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여 한반도를 전쟁위기에 빠트리고 동북아 전쟁 발발 가능성을 한층 고조시킬 수 있는 현장이 바로 평택미군기지이다. 한국 정부의 굴욕적인 협상은 주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349만평의 농민의 땅을 미군 시설에 공여한다고 하였다. 일제에 의해 빼앗긴 땅, 다시 미군에 의해 쫓겨난 땅에서 개간을 하여 농사짓던 땅을 미군이 다시 쓰겠다고 나서자 정부는 한미동맹이라는 명목 하에 그 부당한 요구를 수용한다. 수십 년을 지켜온 땅의 사람들에게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폭력 그 자체이다. 부당한 폭력의 거부는 당연한 일이었다. 협박과 강요,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팽성 주민들은 저항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국가권력의 폭력은 치 떨리는 공포이자 두려움이었다. 만일 도시민들에게 하루아침에 이곳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니 집을 비우고 떠나라고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 땅에 가서 남의 집 농토에 말뚝을 박고 앞으로 한국군의 기지를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미국 시민은 아무도 없다.

935일. 계절이 두 번을 오가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밝혔던 촛불. 겨울한복판에서, 비지땀 흘리는 뙤약볕에서, 청와대에서, 국방부에서, 주민들이 들었던 촛불. 고향을 지키기 위한 6·70대 노인들의 935일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대장정이었다.

올 초 고향을 묻던 매향제가 있던 날 마지막 촛불을 밝히는 주민들은 절망과 한숨으로 마을을 돌아 나왔다. 3년에 걸친 긴 평화의 여정에 대해 언론과 정부는 애초부터 평택을 외면했다. 외부세력의 개입으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했고 폭력집단과 대화할 수 없다고 했다.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에게 땅은 생명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주민들의 힘으로 바다를 메워 한 평, 한 평 옥토로 만든 주민들. 그들이 수십 년에 걸쳐 돌본 땅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통 받는 농민들 편에 서는 것, 이것은 신앙인의 본연의 의무이다.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상임대표에 문정현 신부가 추대되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회원, 전국에서 모인 평화지킴이들은 대추리의 공동체를 이루며 주민들과 함께 살았다. 평화의 마을 대추리·도두리는 시간이 갈수록 공권력의 위협이 극에 달했다. 평택의 평화를 지키는 일,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는 길은 험난한 길이었다. 땅에서 쫓겨나 괴로워 울부짖고 좌절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하고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한다’라고 위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6년 5월4일 국방부의 행정대집행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인권운동가와 주민들은 연행되었다. 사제단의 신부들은 대추리 초등학교 건물 꼭대기에 올라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공권력의 힘 앞에 모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단은 공권력을 통한 강제집행에 대한 항의단식을 광화문 열린 시민공원에서 9일간 벌이고, 5월 30일부터 각 교구별로 돌아가면서 대추리 공소에서 매일 미사를 드렸다. 이 매일미사는 그해 12월 26일 성탄미사 후 잠정적으로 중단된 후 2007년 3월 26일 미사로 끝을 맺었다. 주민들과 사제들의 매일미사는 소박하였지만, 그것은 폭압적인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하느님을 향하는 힘없는 자의 외침이었다.

또한 평택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대추리·도두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죄 없이 구속된 주민들을 위해 나이 일흔의 문정현 신부는 노구를 이끌고 청와대 노상에서 목숨을 건 단식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공권력은 주민들을 그리운 고향에서 밀어냈다. 주민들의 찢어진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평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정부는 이미 떠났다. 문정현 신부는 자신의 기득권을 버려야만 한미불평등에서 벗어나 주민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며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추상적으로 앵무새처럼 되뇌지 말라. 훨훨 벗어버리고 검문검색을 통과하여 대추리 주민 곁에 다가가라. ‘단 한 평도 줄 수 없다.’ ‘농사짓고 살다가 여기서 죽고 싶다.’ 이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라고 외쳤다. 평화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숨마저 내놓은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평화는 온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운동은 평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천의 개념임을 가르쳐주었다.

4.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보는 눈 - 신앙과 개인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

2006년 신앙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면서 그 이유를 사회적 여론에 호소하며 감옥에 들어 간 최초의 가톨릭신자가 있었다. 이름은 고동주,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 “전쟁 없는 세상 활동가, 가톨릭 대학생연합회원”으로 소개한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군사문화, 특히나 군대에 가지 않으면 국민의 의무를 거역하는 것으로 단죄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가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서구의 경우 그리스도교의 평화주의라는 가치에 따라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는 인정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평화에 대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이라는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외면하는 것도 바른 태도는 아니다. 군대의 입영거부를 반국가적인 양심이라는 굴레로 둘러씌우는 것 역시 옳은 이해는 아니다. 이들은 군대가 아닌 민간대체근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고동주가 밝힌 입장은 아주 성서적이다.

“저는 천주교신자로서 대학에 입학해서 가톨릭학생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공부했고, 여러 활동들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내야만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그러할 때 진정 기쁜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저에게 들려온 기쁜 소식은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 서로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 미워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가장 최악의 결과는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 저에게 군대는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부추기는 곳이 군대입니다.

군대는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집단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협할 것이고, 그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제가 군대에 들어간다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두려워해야 하고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고 또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군대에서 받을 훈련을 상상해봅니다. 적으로 상정되는 인형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총칼로 찌르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훈련을 받겠지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저는 예수님께서 저에게 들려주신 복음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이것을 버리게 된다면 저의 삶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저는 군대에 들어갈 것을 거부합니다. 저는 이미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 저는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살고자 군대에 가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한 고동주는 2007년 9월 28일 사회적 형벌을 마치고 출소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사회교리서와 공의회 문헌에서 병역거부권에 대해서 분명히 지적해주고 있다. 우선 사회교리서는 “군인 생활로 조국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위한 역군”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양심상의 이유로 무기 사용을 거부하며 다른 방법으로 인간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가 공정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11)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대체복무제 도입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정부는 2007년 9월 18일 종교적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제도를 2009년부터 시행하기로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매년 750명이 병역거부자로 감옥으로 가는 대신 대체복무를 마련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가톨릭교회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소수자의 인권, 양심의 자유, 나아가 종교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지난 2002년 3월 말 김수환 추기경은 교육방송에 출연하여 “신앙에 의한 양심적 병역거부는 존중돼야” 하며, “개인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국가의 안보에 크게 해치지 않는다면 병역의무에 못지않은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뜻을 밝혔다. 양심의 자유에 입각한 대체복무에 대한 사회적 논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는 올바른 교도권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시대적 징표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안에서 ‘병역거부권과 대체복무제도 도입’과 관련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짐과 동시에, 교회는 앞으로 청년 신자들의 종교적 신념 속에서 선택한 것에 대해 긍정적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사실 2001년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처음 공론화되었을 때 주류 종교의 지도자들은 매우 곤혹스러워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WCC 계통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인권위원회를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천주교 역시 원칙적인 지지입장을 표명하면서도 대체복무제의 도입 시기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불교 종단들은 공식적 입장 표명을 유보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내부 기류는 대체복무제 도입을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반면에 개신교 최대의 초교파조직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만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 반응과 관계없이, 또한 한국군의 해외 파병이나 전쟁 참여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소속 종교의 평화주의적인 교리를 학습한 많은 청년 신자들은 양심적 병역거부 대열에 나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각 종교의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이미 전쟁이나 파병 반대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허다한 청년 신자들을 양심적 병역거부로 이끌고 있기도 하다. 교리적 가르침으로 감옥을 스스로 선택한 여호와 증인들이나 안식교 신자들 그리고 개신교 주류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천주교와 불교 신자가 하루에 2명씩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제 발로 감옥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수수방관한다면 올바른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될 수 없다.

지난 8월 8일 한국남자수도회와 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주관한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도입에 대한 신학생 설문조가 결과 보고 워크숍’ 결과에 의하면 69.1%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가 개인적 선택의 자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교회의 역시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 않고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대체복무제에 대한 정부 입장이 긍정적 판단과 2009년부터 도입하기로 하였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표명하여 사제를 지망하는 신학생들이나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무기를 잡고 국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봉사를 통해 더 깊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기획위원회 200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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