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늦가을에 캐나다를 간 적이 있다. 그곳 단풍잎은 붉은 빛이 하도 맑아서 정말 예뻤다. 그 아름다운 선혈이 낭자한 낙엽 사이를 걸어 서점엘 들렀는데, 한창 달력이 전시되고 있다. 수십 수백 종은 됨직했다. 인디언 문화를 소개하는 달력이며 늑대 사진들이 많았고, 여러 예술가들의 미술작품이 깔끔하게 디자인되어 달력에 박혀 있었다. 달력은 특성상 한 번 구입하면 일 년 365일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법이라서, 그 사람의 영혼에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고, 따라서 공들여 만들었으니 달력 값도 꽤 비쌌다. 달력이라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거저 얻는 게 상례인지라 좀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선물도 할 겸 해서 몇 개 사들고 나왔다.

우리 돈으로 계산해보면, 십여 년 전인데도 달력 한 부에 1만원정도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달력 기획 사업을 하면서 알아보니, 한 부당 판매가가 1천5백원이란다. 몇 년째 가격을 올릴 수 없는 것은 교회달력 시장의 엄청난 경쟁 때문이란다. 요즘은 출판사뿐 아니라 신학교나 교구에서도 달력을 수익사업으로 만든다. 그러니 본당에서는 본당 사제와 연분이 있거나 가격이 싼 쪽을 선택한다. 물론 어디나 가격은 비슷하고, 달력의 수준도 비슷하다. 달력제작 단가를 낮추려다 보니 달력 만드는 사람들은 사진도 그림도 거저 얻으려고 한다. 사실 좋은 달력을 기획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마련이다. 결국 달력 생산자는 저투자로 질 나쁜 달력을 만들어 인맥에 의존해서 팔아보려고 애쓰고, 수요자인 본당에선 장사하는 신자들의 광고를 실어주는 대신에 돈을 받아 달력을 사들인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대림절이라고 달력을 거저 나눠주면서 생색을 내는 것이다.

교회는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 복음 안에서만 빛을 발하는 메시지를 신자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데, 그 방법에서 우린 교회의 오래된 전통에서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한다. 성당 안에 있는 수많은 조각들과 스테인드글라스, 이콘(성화) 등은 라틴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사제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던 신자들에 대한 배려였다. 그들은 이미지를 통하여 성화될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사찰 벽면에 탱화나 심우도와 같은 도판을 그려 넣어 불자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심오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지침이었고, 그 안에서 배워 착하게 살고 영생을 발원하였다. 학력수준이 높아졌다는 대한민국의 천주교인들도 사실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 교회의 신앙교육 수준은 치졸하면서 극단적이다. 한편에선 신자들의 고유한 사정과 상관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기도, 틀에 박힌 성모상과 십자고상으로 생각이 없고 영적 자극이 없는 신심생활을 강요하거나, 한편에선 유한부인들이나 식자들을 위한 제한된 교육 프로그램에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 물론 단결력을 발휘하는 이런저런 행사가 많은 것도 접어둘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마저도 사제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형국이고 보면, 신자들은 자기 내면의 ‘깊은 고요’에 머물러 자기 신앙을 성찰할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 그들은 그저 ‘할’뿐이다. 생각은 필요가 없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대신 생각해 줄 것이므로. 그들은 교육시간에 모르던 교리/성서 지식을 ‘배울’ 뿐이다. 자기 안에 움트고 있으며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 자신과 대화하지 않는 신앙은 돌처럼 굳은 신앙이다. 그들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제 삶 속에서 교회 안에서 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상관있는 신앙이 필요하다.

집안에서 벽걸이용으로 전락한 이콘의 본뜻을 살려야 하고, 문자보다 더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미지를 통하여 신자들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성상과 성화는 그런 이미지를 드러내는 매개물이니 여기에 공력을 기울여야 한다. 묵고 계신 곳을 묻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다. 그러니 볼 것이 있어야 한다. 아마 달력이 볼 것을 가장 폭넓게 제공하는 대중적인 수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달력에 대한 섬세한 판단이 있어야 한다. 다른 예산을 줄이고 투자할 가치가 있다. 가능하다면, 본당에서 여러 달력을 구비해 놓고 신자들에게 직접 선택할 기회를 주어도 좋겠고, 일년에 한 번은 달력을 통한 사목전략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목전략을 고민하는데,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상업성과 권력의 의도를 넘어서는 복음적 가치의 발견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르네상스 시기에 베드로 성전을 장식했던 라파엘로의 경우에, 그는 거룩한 남녀 성인들과 주님의 모습을 당대의 지배권력과 귀족들의 모습으로 갈음하였다. 그의 그림에서 예수 아기씨를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는 나자렛 촌집이 아니라 궁전에서 귀족처녀 마리아를 만나고 있다. 이 시기에 제작된 많은 성화에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궁전에서 놀았고, 마침내 수난을 받으신 뒤에는 천상의 봉건적 지배 권력자가 되신다. 이는 복음서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었지만, 이 화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사치스러운 교황과 제후들의 입맛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적 가치를 제대로 읽어야 이미지 작업도 의미가 발생할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방법의 문제보다 복음을 이해하는 우리의 안목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상봉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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