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걱정하는 사목자들 가운데 흔히 신앙과 삶의 분리 현상이 갖는 문제를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를 본다. 성당 안에서나, 또는 미사 전례 안에서만 신자이지 성당 문밖을 나서는 순간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이 세속의 논리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그저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의 소견으로 신앙과 삶의 분리 현상은 이미 교회의 성사 전례와 신앙교육 안에 내재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의 전례나 성사생활은 구체적인 생활 세계 안에서의 실천적 맥락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거기서 자주 벗어나 전례 참여를 활성화하는 것이 마치 참된 신앙생활의 본질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교회의 오래 된 관념 속에 성당생활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다. 성당생활과 신앙생활의 묵시적 동일시는 신앙생활을 오로지 성당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주일미사에 잘 참여하고, 고해성사 잘 보고, 신심단체나 소공동체 활동 잘하고, 교무금과 헌금 잘 하는 신자야말로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고, 신자들에게 이것을 잘 지도하는 신부야말로 사목 잘하는 것이다.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교회는 삶에 초탈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 스스로의 이익이 관철되는 지점 이외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야말로 교회가 수호해야 한다고 외치는 ‘생명’에는 무한한 관심을 쏟지만 그 생명 하나하나를 일구고 살아가게 하는 환경인 ‘삶’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교회는 세상을 향해 점잖게 자신의 교의를 부과할 뿐이다. 삶을 말한다는 것은 경박한 짓이고 자칫 정치적인 문제에 휩쓸리는 것, 종교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창한 ‘세상을 위한 교회’는 오늘 우리 시대에 이렇게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삶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세속의 모든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세속의 질서와 논리를 자신 안에 내재화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왜’라고 묻는 데 소홀하다. 왜 우리는 이런 사목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추진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런 대정부 메시지를 발표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아주 짧게 하거나 이미 답변이 되었다고 전제하고 오로지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는 데 그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효과만 있다면야 어떤 도구나 방법이든 구애받지 않겠다는 자세다. 과연 그 방법이 진정으로 교회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 실천에 합당한 것인지 따져 묻지 않는다. 따져 물었다가는 그 이외에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면박을 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내 많은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런 질문의 부재, 내지는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환경 등에 있다.

신앙과 삶의 분리 현상을 걱정하는 사고방식은 애초부터 두 개의 단어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신앙은 저쪽에 있고, 삶이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대로 ‘예수 살기’는 ‘예수 믿기’의 인식론적 근거이다. 예수의 눈으로 삶을 보고, 예수와 일치하여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교회란 바로 이 불가분의 일치를 날마다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동시에 각종 성사와 전례 생활, 개별적인 사목 프로그램들로써 이것을 더욱 더 강화하고 실천하는 도량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줄 안다.

이진교 / 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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