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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성전을 먼저 세워야

 

요즘 전국에는 중단기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수의 택지지구와 신도시 개발이 예고되어 있고 실제 사업이 진행 중인 곳도 많다. 그야말로 토건공화국이라 부를 정도로 전국이 온통 부동산 건축붐이다. 이를 추진하고 있는 중앙이나 지방 정부는 모두 서민 주거 안정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본래의 의도대로 이루어질 것인지 궁금하다. 과거의 예로 볼 때 이러한 대규모 도시개발 사업들은 이른바 건축업자들과 투기업자들의 배만 불릴 뿐 다수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히게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도시와 재개발 사업의 전면적 추진과 그 안에서 인간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당연히 신학적 사목적 성찰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는 무엇이고, 이것은 어떤 신학적 의미와 사목적 실천을 교회에 요청하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는 세속의 일반 사업체와 같은 사업적 전망이나 시장 진출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오늘 국민 대다수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이런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기껏해야 종교 부지 확보를 위한 입법 투쟁만이 교회 일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여하튼 이런 신도시나 재개발 지역에서도 많은 새 본당들이 설정되고 또 여차저차하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확보한 부지에 성전 건축이 이루어질 것이다. 새롭게 그 도시의 시민이 된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몇 번씩 새 성전을 건축하는 본당만을 아주 운 좋게(?) 따라다녀 본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추진하는 사제와 신자들이 참으로 걱정스럽다.

성전 건축 계획이 발표된 뒤부터 사실상 본당의 모든 사목 활동이란 것은 그 성전 건축의 종속 변수가 되어버린다. 세대 당 최소 얼마씩 건축 헌금을 약정해야 하고, 본당 내 각종 사도직 단체나 신심 단체의 예산은 대폭 삭감된다. 본당 신자들의 건축 헌금만으로 성전 건축의 태반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아는 본당 사제는 이제 다른 본당으로 자주 앵벌이(?)를 떠나게 되면서 신자들은 자기 본당의 사제가 누구인지 서서히 헷갈리게 된다. 신도시로 이사 온 전혀 모르던 신자들끼리 미처 서로 알기도 전에 성전 건축 헌금의 납부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일개 평신도의 생각으로 나는 왜 성전이 처음부터 그리 커야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성전 이외의 부속 건물과 그 많은 수의 방들이 과연 처음부터 필요한 것인가? 50년 뒤를 내다보지 말고 지금 당장 5년 앞을 내다보면서 작고 소박하게 시작하면 안 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하여 지금 신자들의 신앙적 비전과 삶의 형편으로 건축된 성전은 왜 불가능한지 묻고 싶다. 정부의 이런 연쇄적인 대규모 신도시 개발이나 도시 재개발 사업들로 인해 나는 자칫 몇 년 후면 그 큰 성당이 텅텅 빌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건축비의 태반을 본당 외부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성전에 대해서 신자들은 과연 얼마나 큰 애정을 갖게 될 것인지도 궁금하다. 본당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으로 짓는 성전이 아니라 역으로 끊임없이 그 열정을 강제하거나 추궁하면서 진행되는 성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한다. 본당 사제가 신자들을 일대일 면담하여 약정금을 종용하고, 주일마다 누가 얼마 냈는지 주보 사이에 간지로 공개되는 현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다가 자칫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는 열정의 최소한 얼마라도 보이지 않는 성전에 할애할 수는 없을 것일까? 그리하여 우리 신자들의 삶과 영성적 사정을 살펴서 그야말로 ‘건전한 신앙생활’을 유지하게 하고, 성전 건축비의 다만 얼마라도 지역사회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돌려줄 방법을 찾는 것은 어떨까. 신자들은 건물을 짓기 위해 파견된 공병부대의 부대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신자들의 영혼 사정을 살피는 본당 사제가 그립다. 신자들을 단지 세대 수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으로 알아봐 주고 관심 가져 주는 사제를 열망한다.

교회여, 세상이 물질 만능주의에 빠졌다고 함부로 욕하지 마시라!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러하니.

이진교 / 200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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