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의 구약 이야기-1]

오늘부터 글을 연재하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독자를 찾아뵙게 되었다.

한국에서 '평신도 신학자'는 아직 낯선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물론이고, 동료 신자들도 종종 "평신도 신학자가 뭐하는 사람이오?" 하고 질문하신다. 그 직업으로 생활이 되겠냐고 걱정해 주시는 분들은 대개 교회의 사정에 밝은 편이다. 가톨릭 신학 공부의 어려움을 이해하시는 분들은, 차라리 그 열정과 노력으로 다른 학위를 땄으면 낫지 않았겠느냐 하고 '조언'하시기도 한다.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대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분들이야말로 가까운 분들이기에 정말 고맙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그 자체로 선한 직업 아닌가. 우리 교회가 평신도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시작된 점을 상기해 보면, 나라도 계승해야만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래서 평신도 신학자를 어엿한 신학자로 맞아 주시고, 신학이 필요할 때 임무를 맡겨 주시는 것이야말로 내심 바라고 있다는 점도 이 지면을 통해 조심스럽게 밝히고 싶다. 우리 교회 안에 열등한 존재란 없지 않나.

평신도 신학자가 놀 자리는 아직 좁고 그나마도 대개 불안하다. 어떻게 하면 평신도 신학자의 역할이 더 늘어나서 우리 교회의 다양성과 건강함에 기여할 수 있을까? 뾰족한 해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묘한 수가 따로 있으랴. 신학자답게 계속해서 충실하게 신학을 하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신학을 배우는 일, 신학적 성찰을 듣고 나누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곧, 신학 밖에서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잠시 교회를 돌아보면, 그래도 평신도 신학자는 다른 평신도 전문가들과 비교할 때 그리 못한 처지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면 가톨릭교회의 평신도 음악 전문가나 미술 전문가들의 처지는 더 힘들게 보인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의' 평신도 일꾼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평신도 신학자는 불평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신학의 대중화

평신도 신학자에게 이렇게 한 달에 두 번 칼럼을 연재할 기회가 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좋은 기회를 제안해 주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편집진에 감사드린다. 필자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 칼럼을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을 조금 쉽게 나누는 장으로 삼으려 한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학술잡지에 실리는 전문적 신학자의 글은 어렵기 마련이다. 학자들도 자기 분야를 벗어나면 이해하기가 녹록치 않은 법이다. 하물며 일반 신자들에게는 말하여 무엇하랴. 그래서 현재 전문적 신학자의 작업과 일반 신자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벽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런 벽이 반드시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을 당대에 또는 지금 몇 명이나 이해할까. 좋은 신학이란 일반 신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필자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독일 학생들은 농담조로, 칼 라너 책의 '독일어 번역본(deutsche Übersetzung)'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오죽 답답하면 이런 말을 했겠나. 독일 신학생들이 모국어로 읽어도 어려운 이분이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그저 '나의 벽'을 누그러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별로 잘나지도 않는 생각을 논문으로 어렵게 썼으니, 조금 쉽게 풀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그렇다. 결국 내가 쌓은 '말의 벽'을 스스로 조금 허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골똘히 생각해 보니, 내 생각을 더 많은 동료 신자들과 소통하는 일이야말로 두근거리는 멋진 일인 것 같다. 그리고 평신도 신학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신학이 고립되지 않으려면 소통의 장에 나서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이런 생각이 들었으리라.

하지만 걱정이다. 끝까지 망설이게 만들었던 염려가 마음에 있다. 그것은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지금까지 논문을 서너 편 밖에 발표하지 않은 주제에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길게 연재할 능력이 아직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려 한다. 한 권의 책과 두 편의 논문을 나누고 그칠 것이다. 지금은 용기가 앞서는 형국이다.

부디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 선의로 시작하고 성실하게 진행되는 일은 언젠가 최소한 그 원의는 이해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아직까지 이런 믿음이 배신 당한 적은 없었기에, 또 한번 간절한 마음을 품는다.

교회와 사회를 위해 우리는 각자의 처지에서 노력한다. 저마다 빈 구석이 보이면, 각자의 방법을 통해 메우려 노력할 뿐이다. 필자의 어설픈 노력도 그렇게 봐 주셨으면 좋겠다. 모든 신앙인이 이렇게 저마다 노력한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이뻐해 주시리라. 일단 이것으로 첫 회를 마무리하겠다.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다음부터 본격적인 연재를 하기 전에 간략하나마 필자가 직접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짐작된다. 필자는 이른바 '평신도 구약학자'다. 몇 년 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는 한님성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한다. 세부전공은 성서언어학이다. 히브리어와 그 친족어들을 즐겨 다루고, 고대 근동과 구약성경에 대해 연구하고 발표하며 살고 있다. 아직까지 세상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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