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시민행동가 마웅저

최근에 버마 스님들의 총파업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지난 7월 25일의 시위에는 옛 수도 양곤에서만 10만명 이상의 시위대가 쏟아져 나와 시내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에 군부는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경고했으며 향후 2개월간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26일에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했으며 경고사격을 하기도 했다. <버마 민주화의 소리 방송>은 군부의 폭력 진압으로 인해 스님 5명을 포함해 일반 시민 10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국영방송인 <MRTV>에서도 1명이 사망했고 3명 이상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그 외에도 25일 밤에는 유명한 영화배우 자가나(Zarganar)과 정치인 3명이 체포되었다. 이미 3년 전 정치범으로 투옥된 바 있었던 자가나가 다시 체포된 것은 군인들을 비판한 것은 물론 시위하는 스님들에게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으며 동료 영화배우들에게 시위 참여를 촉구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스님들의 식사가 끝나는 매일 12시에 각 사찰을 중심으로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버마민주화운동 활동가로 살아왔던 마웅저(38세) 씨를 우리신학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평안한 얼굴에 정연한 이론을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성공회대학에서 NGO학과를 다니고, <함께 하는 시민행동>에서 사회활동가로서 인턴십을 밟고 있는 그는 정당정치보다는 시민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활동하며 배워서 민주화된 조국에서 필요한 대중운동을 하고 싶어한다.

‘버마’라는 나라이름부터 이야기를 해보고 싶네요. 공식 국명을 ‘미얀마’라고 알고 있는데, 왜 버마라고 지칭하죠?

저희는 항상 사람들을 만나면 ‘미얀마’라는 이름 대신에 예전처럼 ‘버마’라고 불러주길 바랍니다. 본래 버마라는 이름도 한 주(州)의 이름입니다. 정부 공식발표에 따르면 버마 인구의 70%가 산다고 하는데, 많은 수의 인구가 산다고 해서 주 이름으로 나라이름을 정하는 것 자체에 저는 우선 반대하지만, 미얀마란 이름 역시 마찬가지로 반대합니다. 미얀마라는 이름은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1988년 8월 8일 미얀마에서 대대적인 민주항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당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래서 군부독재 정권은 자신들의 폭력적 이미지를 없애고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시민들의 기억에서 없애기 위해 국명을 바꾼 거지요. 그러나 이 역사는 잃어버리면 안 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마’를 고집합니다. 2000년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을 무력화시키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지금 군사독재정권은 불법정부이고, 불법정부가 바꾼 이름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버마가 민주화되면 시민들의 마음으로 다시 국명을 정해야 합니다. 그때는 이름을 ‘젓가락 나라’ 로 하든 ‘숟가락 나라’로 하든 상관 없습니다.

‘버마’는 불교국가라고 하는데, 불교 세력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모양입니다.

국제사회에서는 ‘버마’를 “황금의 땅, 불교의 나라, 버마”라고 하는데, 이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절반 이상이 불교신자이긴 하지만 이곳엔 이슬람 신자들도 있고 그리스도교인들도 있지요. 그래서 종교차별을 야기시킬 위험이 있는 이런 말보다 그저 ‘다(多)민족의 나라’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보통 정부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 통계는 다분히 독재정권의 의도가 개입된 잘못된 통계라고 믿고 있는데, ‘버마’의 인구는 5천6백만이고, 인구의 70%가 버마주에 살고 있으며, 인구의 90%가 불교 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50% 정도가 버마주에 살고 있고 불교도가 90%나 된다고 믿을 수 없지요.

발표에 따르면 나라 안의 소수민족이 135개라는데, 한 곳에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 수는 없는 것이고요, 불교도가 90%라지만, 정작 수도였던 양군이나 제2 수도가 된 만델리에 가더라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슬람 사원과 교회 건물입니다. 시민사회에서는 이러한 종교 사이에 별로 차별도 없고 서로를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사정권은 불교만을 편들게 됨으로써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불교도들이 서로 갈등하고 싸우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1988년 이후에 군부독재는 지난 20년 동안 얼굴만 바꿔가면서 통치해 왔는데, 2가지 방법을 써왔죠. 첫째는 총칼로 다스리는 것이고, 둘째는 불교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버마’에는 1개의 방송과 3개의 신문사가 있는데, 모두 국영입니다. 여기선 군인들이 사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을 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줍니다. 시민들은 그걸 보고서 정권에 대하여 혼란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 불교 스님들이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나요?

불교의 스님들은 예전부터 민족해방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온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 불교계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직접 관여하지 않는 편입니다. 다만 긴급한 사안일 때만 나서게 되는 것이지요. 1988년 민주항쟁은 학생들이 주도하여 성공시켰는데, 이때에는 스님들도 시위에 참여하였지요. 실상 ‘버마’에서 제일 힘이 센 그룹이 학생과 스님들이거든요. 여기선 스님들이 나서기 시작하면 웬만한 일은 다 끝을 보게 됩니다. 1988년 민주항쟁 이후에 쿠데타로 다시 집권한 군사정권은 선거로 새로 탄생할 민주국가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선거를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론 민주인사들을 다시 탄압하기 시작했죠.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정당만 인정하고 시민운동가들은 모두 체포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일부 활동가들은 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90년 선거가 치러지기 전인 3월에 1988년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군인들이 참석자들을 체포하고, 총을 쏘며 대회를 무산시켰는데, 이 와중에 몇 명의 스님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러자 중견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의 사과를 요청하며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정부에서 사회질서를 위해 자제해 달라고 큰 스님들을 설득하여, 결국 시위가 중단되어 실패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시작된 ‘버마’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스님들의 입장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시위는 8월 15일에 정부에서 기름값을 올리면서 발생한 것입니다. 버스운행마저 중단되고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걸어서 학교나 공장에 가야합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양곤에서 8월 19일부터 자연스럽게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놀란 정부에서 제2의 아웅산 수지라고 불리는 13명의 민주화운동 지도자들과 200여 명의 활동가들을 체포하였지만, 시위는 계속 확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마당에 9월 5일부터 지방도시에서부터 스님들이 집단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군부독재는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3명의 스님이 체포되었으며, 어떤 군인들은 스님을 전봇대에 묶어 놓고 때리기도 했고 옷을 벗기기도 했습니다.

불교차원에서는 스님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서, 9월 17일까지 정부가 사과할 것을 요청했지만 답이 없었기 때문에 9월 18일부터 스님들이 나서서 총파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9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꼭 19년째 되는 날입니다.

처음에는 경제문제 때문에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발생한 시위가 9월 5일부터는 스님들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스님들의 반발을 군사정부에서 예상하지 못하고 폭력을 사용한 것일까요?

정부에서도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입니다. 시위를 막는 방법은 폭력적으로 진압하거나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인데, 진압하지 않더라도 문제 해결은 되지 않을 테니까요. 일단 폭력진압을 통해 시민들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이겠지요. 지금 정부는 경제문제 역시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름값을 올린 게 화근이었는데, ‘버마’는 벼농사 중심이면서 작은 규모의 산유국이거든요. 그런 나라에서 기름값이 비싸서 시민들이 걸어다녀야 하는 게 말이 안 되는거죠. 정부에선 그래도 우리나라 기름값이 한국이나 다른 나라보다 싸다고 하는데, 환율 차이를 생각하면 그건 비교대상이 안 되는 거죠. 하루벌이 천원하는 사람이 많고, 초등학교 교사가 3만원 벌고, 전화기가 3백만원 정도라서 부자만 전화기를 갖고 있는 나라랑 다른 선진국을 비교할 수는 없지요.

‘버마’ 스님들이 이번 시위에 공감하게 된 것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버마’의 불교는 소승불교라서 수행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잘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거든요.

실제로 ‘버마’의 스님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부족한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시민들은 하루에 밥을 세 끼 먹는데, 가난한 이들은 하루에 한 끼만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마저 먹을 수 없어서 절에 와서 밥을 청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스님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겠죠. 스님들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시주를 받아서 사는데, 동네에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겪는 사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요.

스님들이 하는 말에 이런 게 있습니다. “내 코가 내 코가 아니다. 시민의 코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숨 쉬고 있다.” 스님들이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시민들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상황에서는 시민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니 불교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988년 전에도 큰 스님들이 군사정권에 요청하여 정부와 민주화운동 단체들 사이에 대화를 주선하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리고 1990년의 경험을 하고나서, 큰 스님들이 사태의 본질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정부가 공식적인 사과를 할 것, 경제문제를 해결할 것, 시위 전후에 체포된 수감자들을 석방할 것, 정치인과 군부정권이 서로 대화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불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국제사회에서는 ‘버마’를 불교의 나라라고 하면서, 다른 종교는 탄압하더라도 불교에는 매우 호의적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불교 역시 자유롭지 않으며, 정치적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가끔 군부 지도자들의 도덕성과 신앙을 선전하기 위해서 국영방송에서 이들 군인들이 사찰에 후원금을 전달하는 장면을 촬영해 가지만, 방송이 나간 뒤에는 그 돈을 도로 빼앗아 가는 게 비일비재합니다. 불교 스님들조차 대중을 모아놓고 법회를 하려면 해당관청에 신고를 해서 승인을 얻어야 하고, 그들의 설법 내용은 모두 감시당합니다. 물론 출판물들도 검열을 받지요.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반정부적 경향이 있는 스님들은 아예 법회를 열지도 못합니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이번 시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시나요?

1988년 ‘버마’ 민주항쟁 이후에 예전에 군부독재가 만든 ‘버마’식 사회주의 헌법은 폐기되었지만, 곧이어 등장한 쿠데타 정권은 1990년 총선거 이후에 시민대표 중심으로 헌법을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회주의헌법, 사실상 군부독재 헌법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오늘날까지 오고 있어요. 이른바 아직도 군정(軍政)을 하고 있는 거지요. 여기엔 헌법도 국회도 없습니다. 이번 시위에선 2백명 정도가 죽고, 3천명 정도가 체포된 상태에서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버마’에선 정치적 자유가 없습니다. 3명 이상 모여서 집회를 해도 불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사태를 잘 돌보고 지켜서 민주화되지 않으면 불교도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모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버마’는 민주화 문제뿐 아니라 50년부터 계속된 내전의 문제도 시급한 해결과제입니다. 수도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민주화 문제가 중요하지만 지방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내전문제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태국 국경 근처에는 난민들도 많이 있는데 아직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버마’는 8개의 큰 민족으로 나뉘어 있는데,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들어온 영국식민통치세력에 아웅산 장군(아웅산 수지의 아버지)이 제안하여 1948년에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해방된 독립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웅산 장군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민족들을 설득하여 일단 단일한 민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우고, 15년간 살아보다가, 그래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서로 분리 독립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1947년에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하면서 그 후계자들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곧바로 내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소수민족의 무장독립투쟁이 발생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버마’의 다민족 시민들이 원하는 민주화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그 땅에 자기의 종교, 문화, 문학을 지키며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 마웅저(Maung Zaw) 씨는 버마 8888 항쟁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한 후 버마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왔다. 1994년 군부의 탄압을 피해 버마를 탈출, 한국에 왔고 2000년 이후 현재까지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진행중이다.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했고, 현재는 한국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인턴으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마웅저와 함께(http://withzaw.net)를 운영중이다.

/한상봉 2007.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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