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엔 좀 애매한>, 최규석, 사계절, 2010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6월 항쟁을 그린 그의 전작 <100°C>를 처음 사 들고 읽던 날, 나는 지하철에서 혼자 훌쩍훌쩍 울고 말았다. 나의 이 궁상스러움 탓일까? 만화가 최규석의 작품들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가난한 대학생들의 자취방을 무대로 한 <습지 생태보고서>에서부터 <대한민국 원주민>, 단편 <24일 차>에 이르기까지, 그는 '찌질한 청춘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궁상스러움과 그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왔다. 최규석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 존재하지만 인식하지 않으려는 현실에 대해 유난히 민감한 눈을 가진 듯하다.

울기엔 좀 애매한… 맘껏 웃기엔 가슴이 서늘한

그의 작품 중에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는 <울기엔 좀 애매한>(사계절, 2010)을 소개한다.

배우 원빈과 이름만 같을 뿐 외모는 전혀 다른, 자타공인 불가촉 루저 원빈은 만화과에 진학하고 싶지만 어려운 집안 살림 탓에 망설이다가 뒤늦게 입시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린다. 여기에, 좋은 대학에 붙고도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재수를 하는 류은수, 학생들한테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지만 실은 찌질한 인생들에 애정을 갖는 미술 강사 정태섭 등을 더해 입시미술학원 만화반에서 벌어지는 1년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 자신이 미술학원에서 대학입시 만화 강사로 일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우울한 현실을 특유의 유머과 독설을 실어 그려냈다.

저자가 '자학 개그'라 부르는 작품 속 유머는 맘껏 웃기엔 가슴이 서늘하다. 학원비가 밀리기 일쑤고 매일 사발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원빈과 은수가 정수기의 온수가 떨어지자 생라면을 먹으며 나란히 앉아 나누는 대화다.

"한겨울에 보일러 기름 넣을 돈이 없는 거야. 끓인 물 페트병에 넣어서 끌어안고 자봤냐? 아침에 그 물로 샤워도 한다."
"한 달 동안 초코파이만 먹어 봤어요?"
"참치캔 헹군 물에 라면 스프 넣고 끓여 먹어 봤냐."
"그거면 석 달은 먹죠."
"40평 아파트에서 등교했다가 월세방으로 하교해 봤어요? 인생이 자이로드롭입니다."
"너 엄청 잘 살았구나? 난 모태 빈곤이야. 어디서 깝쳐?"
"잘 살다 망하는게 훨씬 힘든 거죠. 원래 가난하면 적응돼서 잘 모르잖아요."


울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조차 헷갈리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

<울기엔 좀 애매한>은 입시 만화반 아이들의 상황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것은 비단 10대들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실력은 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막막한 현실을 마주하는 원빈과 은수 뿐 아니라, 실력은 그저 그렇지만 부모님이 부자라 돈으로 포트폴리오를 대신 만들어 대학에 들어가는 지현이, 대학에 들어갔어도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학자금 대출 상환을 걱정해야 하는 태식의 모습까지, 이 모든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빈과 은수는 이런 남루한 상황 속에서 울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조차 헷갈려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책방 주인에게 임금을 떼일 뻔한 원빈에게 같은 학원 은지가 "인생 찌질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맨날 그렇게 웃고 떠든대" 하고 핀잔을 주자 원빈이 말한다. "그… 그렇다고 울기도 좀 그렇잖아? 하하… 하" 그러자 옆에 있던 은수가 거든다. "그게 말이지, 나도 그래서 한번 울어 볼라고 했는데…… 이게 참 뭐랄까…… 울기에는 뭔가 애매하더라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고아가 된 것도 아니고……." 함께 있던 강사 정태섭이 "웃거나 울거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지"라고 하자 원빈과 은수는 입을 모아 이렇게 반문한다. "누… 누구한테요?"

작가는 자기 이익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청소년들에게 상처를 주는 어른들의 모습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돈을 받고 다른 아이들 작품까지 모아 지현이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준 학원 원장이 차를 바꾸는 장면이라든가, 평소에 '인간 중심', '천박한 자본주의' 운운하던 원빈의 책방 사장이 임금 8만 원을 주지 않으려고 돌변하는 장면에서는 가볍게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다.

<울기엔 좀 애매한>은 대학에 붙었지만 등록금을 구하지 못한 원빈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작가는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최규석 작가는 "독자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울분을 토하거나, 학생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작품이면 어땠을까 싶지만 내가 목격한 모습들을 최대한 그 온도 그대로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울기엔 좀 애매한>이란 제목에 대해 "울만큼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슬픈지 모를 복합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사실 상황은 애매하지 않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 목놓아 우는 대신 웃음과 슬픔을 교차시키며 응축된 감정으로 힘있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쪽을 선택했다.

최규석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시선이 '힘든 사람들'에게 향하는 이유를 "어릴 때부터 주변에 힘든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과 친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선량한 시민에게서 세금을 걷어가고, 악독한 정책을 만들어 양극화를 심화하는 것이 자꾸만 눈에 비치니까"란다.

작가의 서늘한 분노만큼이나 서늘한 울음으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세상을 향하는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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