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진실의 힘 치유학교 1기 졸업생 김장호 씨]

“치유자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필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치유는 단지 괴롭고 고통받는 이들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면서 말이다. 뭘 듣겠다는 마음도, 가르치려는 마음도 버리고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치유다."

'진실의 힘 치유학교' 1기 졸업생인 김장호(요셉) 씨는 ‘치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김 씨는 간첩 혐의로 50일간 고문을 받은 후 16년간의 감옥생활 끝에 1998년 대통령 특사로 출소했다. 억울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이제 다른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살고 있다. UN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 행사가 있던 6월 26일 아침, 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송탄에 있는 김 씨의 집을 방문했다.

▲ 김장호 씨 ⓒ문양효숙 기자

열일곱, 홀로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다

일본에서 태어난 김장호 씨는 해방되던 해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어머니의 고향이던 통영 사랑도에 살다가 열일곱 살이 되던 1958년, 가족 몰래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다. ‘돈도 벌고 세상 구경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혼자 어린 나이에 대단하시다 했더니 “내가 덩치는 작은데 모험심이 대단히 많은 사람이다. 요즘 열일곱 살 아이들을 보면 정말 아기 같다”고 말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외국인 등록증도 없이 숨어 지내면서, 혼자 힘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이런 저런 일을 거쳐 건축 일을 하게 됐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계속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던 중에 1972년, 잘 알고 지내던 재일교포 한 명이 1년 정도 북한에 가보지 않겠느냐 권했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공작원을 소개시키는 일종의 브로커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 그는 일본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조국에서 일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일단 한번 가보기로 결정했다.

“배를 타면서부터 조금 이상했다. 여객선이 아닌 아주 작은 어선이었고 어두운 밤에 나 하나만 태우고 갔다. 겁이 없는 편인데 조금 무서웠다. 배를 탄 순간부터 일본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감옥 생활하듯 지냈다. 자유가 전혀 없었고 철저히 통제를 받아야 했다.”

청진항에 도착해서 바로 평양으로 간 그는 1년간 북한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기도 하고 공부도 했다. 1년이 지나자 일본으로 돌려보내줬다.

▲ 6월 26일 열린 '2012 UN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 기념대회에 참석한 김장호 씨(앞줄 오른쪽) ⓒ문양효숙 기자

공항에서의 연행, 이어진 16년간의 감옥 생활

이후 남한 여성과 결혼한 김 씨는 친정에서 몸조리하던 부인을 데려오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김포공항에 도착한 순간, 대기하고 있던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던 것 같다. 큰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신기한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줬다. ‘보통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문제가 그리 크겠는가. 먹고 사는 문제가 크지. 아마 그래서 내가 도청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전화할 때마다 잡음이 심하게 났다.”

연행된 그는 50일간 남산 지하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관절 부위를 집중적으로 때렸다. 표는 안 나고 골병 드는 부위다. 그래도 나는 덜 맞은 편이었다. 감추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갔다 왔다’고 순순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만 ‘일본에서 무슨 스파이 짓을 했는지 말하라’면서 때렸다. 너무 화가 났다. 한 게 없는데 자꾸 때리니까. 나중에는 나도 성질을 냈다. ‘북한 좀 갔다온 게 그렇게 큰 잘못이면 차라리 나를 죽여라’라고.”

일본에서 홀로 생활하며 마음이 단단해졌다던 그에게는 몸이 아픈 것보다 정신적 모멸감이 더 오랫동안 남아있다.

“젊은 사람들이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 나를 동물 다루듯이 했다. 게다가 밤에는 자기들 노는데 노래를 부르라고 시켰다. 그럴 때 정말 마음이…….”

그는 고문과 조사가 막바지에 이르면 잠을 재우지 않는다며 공소장을 쓰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똑같은 공소장을 반복해서 쓰라고 하는데 아주 많은 분량이라 며칠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한다. 계속 쓰게 한다. 나중에는 정신이 몽롱해져서 뭘 쓰는지조차 모른다. 내가 자고 있는지 일어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쓴 공소장을 들고 재판정으로 가는 것이다.”

단 한 명의 방청객도 없던 재판정에서 ‘죄 지은 게 없는데 설마 진짜 감옥에 갈까’ 생각했던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 씨는 1983년 광주교도소로 넘어가던 때에 이르러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과 ‘이건 진짜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감 생활이 5년을 넘어가며 하루가 한 달 같았다’던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번에는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번번히 무산됐다.

얼굴도 모르던 일본인들이 16년간 그에게 영치금을 넣어주고 책, 새 옷을 보내며 마음을 써주었다. 도쿄 기타쿠 현 주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한 마을 사람을 돕자’면서 출소 때까지 그를 도왔다. 그는 그 일본인들이 ‘가족 이상의 사람들’이라며 눈물을 비쳤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에 특사로 가석방됐다. 16년간의 감옥살이였다. 출소한 뒤 2005년까지는 피보안관찰자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 자택 앞에서 환하게 웃는 김장호 씨 ⓒ문양효숙 기자

외로움의 끝에서, 치유학교를 만나다.

재일 교포들은 그에게 ‘밀항을 했으니 진짜 교포가 아니다’라고 했다. 감옥 생활 중에는 ‘다른 사람들은 정말 억울하지만, 당신은 북한에 다녀왔으니 혐의가 있지 않느냐’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너는 진짜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출소 후에도 간첩이라는 손가락질이 끊임없이 따라 다녔다. 두 달 반의 결혼 생활을 함께했던 부인은 출소 후 찾아간 그에게 “차라리 당신이 살인자 같으면 용서해준다”고 했다. 간첩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열일곱 살 이후 그는 일본에서도, 감옥에서도, 대한민국에서도 외톨이였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다. 출소한 뒤 13년 정도 이런저런 일을 하며 혼자 지냈다. 어차피 늘 혼자였기 때문에 일주일, 한 달을 그냥 혼자 있어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싫었다. 특히 단체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모임에 다녀왔다 하면 어떤 ‘색깔’이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출소 후 13년 넘게 그렇게 지내던 그에게 감옥 생활을 함께한 김양기 씨가 고문 치유 모임이 있으니 나오지 않겠냐고 연락해 왔다. 김장호 씨는 망설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와 ‘아픈 데도 없는데 무슨 치유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권유과 김양기 씨에 대한 신뢰에 힘입어 진실의 힘 치유학교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렵게 지냈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는 훈련이 몸에 배어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교도소, 고문 같은 과거는 아예 떠올리지 않고 살아왔다. 그랬던 그가 치유학교 모임에 나가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빌어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 나도 그런 적 있었는데’ 하는 순간이 있다. 마음을 닫아두니까 스스로는 생각하지 못하다가 다른 이의 이야기를 통해 그제서야 같은 상처를 떠올리고, 그 지점에서 함께 해답을 찾게 됐다."

출소 이후 13년 만에 처음 느끼는 신선하고 상쾌한 감정이었다고 했다. 치유학교 모임이 있는 날을 기다리게 됐다. 김 씨는 “내 마음을 되찾아 가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며 자신의 느낌에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 홀가분했다. 위로 받았다”고 표현했다.

▲ 2012 UN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 기념대회에서 치유학교 1기 졸업생들이 정혜신 박사(오른쪽 끝)와 함께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치유학교를 통해 '상처 입은 치유자'로 거듭나다

그는 치유학교 모임에 다니며 “사람 냄새가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기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제는 사람 만나는 게 좋아졌다고 했다. 송탄성당에 다니는 그는 2년째 자기 집에서 신자들과 함께 일본어 공부 모임도 연다. 일본어가 많이 늘지는 않지만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것 자체가 즐겁다"고 했다. 김 씨는 인터뷰 내내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환한 웃음으로 감추지 않고 마음을 드러냈다.

3개월간의 치유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을 위한 심리 치유 센터 ‘와락’에 토요일마다 갔다. 와락에 가는 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껏 몸단장을 하고 간다. 정중하게 듣고 싶어서다. 진심을 다하고 싶어서다. 김 씨는 “나같이 늙은 영감 하나라도 그들 곁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용기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가는데, 신기하게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나 자신을 찾아가는데 큰 도움을 받는다”면서 “감사하다. 치유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 작용인 것 같다. 치유는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 느낀다”고 말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낸 그에게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상대가 국가인지라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참았다. 그런데 지금은 ‘참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한다. 가까이에 진실의 힘을 모르는 동료들도 찾아서 마음을 나누고 말이다.”

그는 ‘잘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꽉 쥐고 있는 마음이 있으면 풀어줘야 한다고. 그래야 정말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얼마 뒤, 김장호 씨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국가로부터 존엄성을 짓밟혔던 그가 자신의 존엄성을 넘어서 다른 이들의 존엄성을 위해 나무를 심고 또 다른 숲을 시작하고 있다.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 (원제: 고문) <작사 : 앨리스 워커 / 작곡 · 노래 : 류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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