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의 삶과 노래]소통과 쇄신

 

 

일산 지역 어느 본당 성가대원들과의 하루피정을 위해 주일 새벽을 달려가는 길은 피로에 지쳐 온 몸이 눅진눅진 했다. 주중 내내 강의 일정이 있었고, 금요일 밤엔 수원교구에서 진행하는 시국미사에 가서 미사음악과 작은음악회를, 토요일은 정의구현사제단과 남여수도자장상연합회가 주최하는 시국미사에 이어 촛불집회장까지의 평화행진, 그리고 다시 차를 몰아 의정부 한마음수련장까지 가 <우리신학연구소>의 워크숍에 함께 했다. 토의와 친교로 밤을 새다시피 하고나니 여러 날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오늘은 주일 9시 미사를 봉헌하는 성가대원들과의 음악피정이어서, 강의 사이사이에 내가 만든 생활성가를 함께 부르거나 들려주게 된다.

이런 어려움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기에 지친 몸과 마음을 애써 진정하면서, 짐짓 태연하게 시작하였다. 피정에 참석한 성가대원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평소 내 노래를 좋아하거나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환한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피정이 진행될 수 있을까?’ 혹은 ‘노래를 부르면서 하는 음악피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라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나눔이든 노래든 쉽게 함께 하지 못한 채로 내내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다.

시작기도를 대신하여「AVE MARIS STELLA(바다의 별이신 마리아)」를 불렀는데, 목소리로만 모든 것을 표현해야하는 무반주성가여서, 전혀 울림이 없는 체육실에서는 처음부터 무리였다. 불충분한 수면과 겹친 피로감이 그대로 목소리에 묻어났고 음정마저 불안했다. 피정대상이 성가대원들이니 그대로 넘길 수만 없다 여겨져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었다.



“청문회스타라는 말 기억하시나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한 때 청문회스타로 떠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대통령에까지 당선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요즘 시국미사스타로 떠오른 것 같아요. 시작은 마산 수정 만에 조선소를 세우겠다는 주식회사 STX에 항의하기 위해 수정트라피스트 수녀회와 주민들이 주최한 서울 역 건너편 길거리미사였어요. 미사음악을 맡아 진행하면서 영성체 후 묵상노래를 부르고, 미사가 끝난 후에는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노래 몇 곡을 부르는 것이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듣더라니까요.

이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진행한 「대운하 반대 시국미사」와 기자회견장에서, 그리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 지구별로 본당을 돌며 순회하는 수원교구 시국미사와 토요일 오후마다 정의구현사제단과 남여수도자장상연합회가 주최하는 시국미사에서 미사노래들과 작은음악회를 진행하느라고 연일 겹치기를 하고 있네요. 저도 이러다 대통령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너스레를 떨다가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촛불집회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제가 21년 전 6월 10일에도 시청 앞 광장에 있었구요. 이번 6월 10일 밤에도 같은 곳에 있었어요. 열기와 함성은 비슷했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평화무드라는 것이지요. 젊은 엄마가 끄는 유모차 속의 젖먹이부터 초중고 학생들과 칠순을 넘긴 노인들까지 하나가 되어, 국민의 의지를 촛불에 담아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텐데, 매스컴에 보도된 내용들은 전경과 대처하고 있는 일부분의 모습이구요. 집회장 곳곳은 대부분 평화와 기쁨으로 넘쳐나고 있었어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언제 이토록 자유롭게 스스로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었나요? 어린 여학생들이 시작한 일이 어른들에게로, 세상 한 가운데서 진행되던 일이 교회 안으로 까지 번진 것이지요. 지난주에는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진행한 시국미사가 있었어요. 이제 함께할 마음만 있으면 주일미사를 촛불집회장에서 드릴 수도 있게 되었지요.

 


재미있는 일도 참 많아요. 저마다 재치와 기지가 엿보이는 피켓을 스스로 만들어 오는데, 간혹 거친 내용을 담은 것도 있지만 두고두고 웃음을 자아낼 기가 막힌 내용들도 많아요. 제가 가장 좋다고 여겨져서 제 차안에 붙여놓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입니다. 거친 표현도 없고 다른 사람을 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지요. 지난 토요일에는 어느 여중학생이 들고 온 피켓 하나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동아일보가 신문이라면, 빨래판은 팔만대장경이다.』였어요.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덮어놓고 헐뜯거나 비난하기보다 이렇게 재치 있는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물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상입니다. 더구나 거칠지 않은 완곡한 표현이 압권입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대운하를 그만 두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었지요.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 두겠다’입니다. 이 말속에는 국민이 원한다면 계속 하겠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지요. 여러분 중에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청와대에 전화를 하실 건가요? 아니면 민원실에 서면으로 접수를 하실 건가요?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면 생각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고, 그렇다면 대통령은 그런 국민을 무시해 버리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릴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의 생각을 촛불로 표현해 내자’고 어린 학생들이 우리를 시청 앞 광장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으시다면 그곳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과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널리 알려 주십시오.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있다구요.”

여기 까지 얘기를 했을 때, 뒤쪽에서 볼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치적인 얘기는 그만 합시다.”
“제가 지금 정치적인 얘기를 했나요? 그랬다면 죄송 하구요. 저는 정치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을 안내하고 싶었는데요?”

“그렇지만 촛불집회에 가라고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 아닙니까? 피정을 하러 와서 그런 얘기를 듣기는 싫습니다.”

“아~네. 그런데 조금 오해를 하신 것 같네요. 저는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촛불집회라는 장소가 있으니 원하는 분은 가보라고 직접적으로 권유한 것인데요. 가고 안 가고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맡겨 드렸구요. 제가 모시고 갈 수는 없으니 자유롭게 선택하셔요. 따지고 보면 오늘 제가 나눌 피정의 내용인 「기쁜소식」이 촛불 얘기와 다름이 없어요. 이제는 신앙인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가 세상으로 스며들어야 할 때이고, 성직자 수도자들께서 그 길을 잘 안내하고 있지요. 토요일 오후마다 열리는 시국미사 후에 성직자 수도자들께서 함께 깃발을 들고 서울광장으로 행진하여 촛불집회장 한 켠에 앉아있는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산위에 모여든 가난한 유태 군중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해 줍니다. 함께 모인 많은 사람들께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 있구요.

기왕에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저는 자주 촛불집회에 가지만 그저 앉아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바라보고 있을 뿐, 주최 측에서 이끄는 대로 구호를 외치거나 일사분란하게 표현하는 연호를 따라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타고난 자유로운 기질 때문에 획일적인 것을 진저리칠 만큼 싫어하는데다, 거친 표현이나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이 평화를 간직하고 싶은 내 마음을 움직여주지 않았으니까요. 올바른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판의식은 꼭 필요하지만 막무가내 식으로 비난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따라할 생각이 없구요.



촛불집회장에 난무하는 피켓 중에 많은 수가 대통령을 비난하거나 막말로 욕하는 내용들입니다. 저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그분을 싫어합니다. 저와 사고방식이 너무 다르고 무엇보다 성격이 서로 안 맞는 것 같아요. 또한 제가 대통령이라면 저렇게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그렇다고 말하거나 정치하는 내용이 내 맘에 안 든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쁘지 않지만, 무자비하게 욕이나 막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싫건 좋건 우리나라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지지하여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만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존중받지 못할 행동을 했다구요?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존중하기 힘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그리고 옛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구요. 그런데 어떻게 한 사람의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적인 권리까지를 마구 짓밟을 수가 있나요?

다 그렇지는 않지만 종종 시국미사 강론 중에 신부님들께서 대통령에 대해 욕설과 막말을 하실 때면 가슴이 무척 아파요. 화가 나고 억울한 심정을 사적인 자리에서 표현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공개적으로 그러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는 다른 생각을 갖은 사람도 함께하고 있거든요. 생각이 달라 내 맘에 들지 않거나 말도 안 되는 잘못을 했다고 해서 나이 많은 어른에게 욕이나 막말을 해댄다면, 그것을 보고들은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나 할아버지가 잘못을 했을 때도 욕이나 막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대단히 끔찍한 일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는, 특별히 신앙인은 평화를 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조금 더 좁고 험한 길을 돌아서 갈지라도 우리는 평화를 간직한 채 이 일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이어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피정강의가 이어졌다. 문제를 제기했던 그는 얌전히

앉아 있는 것 같았지만, 함께 하는 노래를 전혀 따라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이미 피정에서 마음이 떠나 있는 것 같았다. 오전 강의가 끝난 후 점심시간에는 소주 몇 병을 들고 와서 동료들과 함께 마시더니, 예상했던 것처럼 술손님들은 오후 강의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피정이 끝난 후 회식 술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전에 누군가 내게 와서 조심스럽게 귀띰해 주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생각이 다 달라서 그러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마세요. 그 사람 빼고 나머지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해했어요. 그 사람 동생이 경찰관이래요.”

몇 년 전.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민주화정부 시대에 겪은 일이다. 분당의 어느 성당에서 특강을 하는 중에 자캐오에 관한 나눔을 했었다.


자캐오처럼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 당할 만큼 나쁜 일을 하고 사는 사람도 예수를 보고 싶어 나무위에 올랐다. 그 마음 알아차린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청했다. 자캐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눈총과 말(言)화살을 함께 받으면서까지, 예수는 자캐오의 가슴 속에 간직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의 마음을 북돋워주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 시대에 우리 국민 모두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어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아저씨들의 가슴속에도,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과 하늘나라에 대한 동경의 마음이 간직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예수 마음을 닮은 우리는 기회만 닿으면 그 마음을 북돋워줘야 하며, 또한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강의가 끝난 후 본당관계자와 식사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아까 다 좋았는데 왜 전두환 노태우 얘기는 하셨어요? 여기는 다 한나라당이거든요. 강의는 너무 좋았는데 그것 때문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아니 대부분이 한나라당을 지지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아예 전부 다 한나라당이라구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렇게 그냥 지나가고 말았지만, 씁쓸했던 기억은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도 촛불집회는 계속되고 있고 촛불은 꺼질듯 말듯 계속 타오르고 있는데, 그 촛불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다를 것이다. 다른 이의 시선에 대해 덮어놓고 비난하지 말자. 나와 다른 쪽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증오하거나 욕하지 말자. 그런 일에 흥분하고 분노하여 진을 빼기보다는 꼭 기억해야 할 진실을 가슴에 간직하고 싶다. 이 촛불의 시작이 교회가 아니고 세상에서였다는 것과, 어른들이 아니라 가녀린 소녀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너는 네 안에 있는 하느님의 구별된 부분(distinct portion)이다.
어째서 너의 고상한 태생에 대하여 무지한 것인가?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왜 생각해보지 않는가?
무엇을 먹을 때, 그것을 먹는 네가 누구이며
네가 먹이고 있는 것이 누군지를 어째서 기억하지 않는가?
네가 하느님을 먹이고 있으며 하늘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너는 너와 함께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어나는 일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웨인 다이어의 「신성(神性)」이라는 글 중에서,
노예였다가 해방되어 스토아 철학자가 된 에픽테투스(Epictetus AD55-135)의 말을 옮김>

사진 고태환

/김정식 20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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