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그리스도인의 길-83

공동체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받는 존재라고 부르는 소리를 함께 내면에서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모험을 무릅쓰도록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하여 그 사랑받음 속에 존재하도록 서로를 격려한다.

헨리는 성찬례의 식탁에 함께 모이는 신앙의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성인들의 친교와 일치라고 생각했다. 이 거대한 공동체는 문제와 실패들을 안고 있고, 헨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충성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옹호했지만, 한편으로 그 구성원들이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로 참여하도록 초대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로부터 온 존재들이 아니라는 자각을 가지도록 요청하였다. 우리 안에서 또한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깊고도 섬세한 분별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필요로부터 우리가 절대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 구럼비 발파의 책임을 묻는 삼성물산 앞 거리미사에서 한 사제가 성체를 축성하고 있다.

“성찬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하자면 “감사의 행위”를 의미한다.
성찬례를 거행하고 성찬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성찬례적인 삶이란 삶을 선물로, 감사해야 할 선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는, 특히 우리가 삶에서 연속적으로 상실들을 경험할 때에는
가장 확실한 응답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찬례에서 기념하는 위대한 신비는
상실을 슬퍼하면서 바로 그때에 삶을 선물로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은 삶이 부서지기 쉽고 죽는다는 사실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매일 경험할 수 있다.
꽃을 꺽어 손에 들 때,
공중에 춤추는 나비를 볼 때,
작은 아기를 보듬을 때 느낀다.

연약함과 선물받음은 함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기쁨도 이 두 가지와 연결된다.

모든 성찬례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만큼
자주 그리고 친밀하게 바쳐진 기도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기도는 서방의 모든 성찬례의 시작에 있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동방교회 전례에서도 계속 바쳐지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의 외침이며,
죄를 뉘우치고 있는 사람들의 외침이다.

이 자비의 외침은 우리가 어쨋든,
어느곳에서든지 상실에 대해
우리자신이 책임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고백할 때에 가능한 기도이다.

자비를 청하는 것은
우리들의 상실에 대해 하느님, 세상, 이웃들을 탓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진실에 공평치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책임을 지려고 할 때,
비난은 인간의 부서짐에 있어
우리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려는 회심으로 변한다.

성찬례를 기념하는 것은
우리가 둘러싸고 지배하고 있는 악에 대해
우리의 공동책임을 받아들이며 이 세상에 서 있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험한 시대에 대해,
우리가 견디어야 할 비참한 상황
그리고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 할 험악한 운명에 대해
불평만 하며 매달려 있는 한, 우리는 결코 회심에 이를 수 없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삶에서 개인적으로 겪는 갈등이나
지역, 국가, 혹은 세계차원에서 나타나는 모든 갈등, 대립들이 바로 우리자신의 갈등이며,
그것들에 대해 우리들의 책임임을 주장할 때에만
비로소 그 갈등들을 넘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때에만 용서, 평화 그리고 사랑의 삶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반드시 회개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굳은 마음과 대조적으로 뉘우치는 마음은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인정하는 마음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헨리 나웬 <뜨거운 감동의 마음으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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